[금요초대석]독립운동가 윤주연 옹
함흥형무소 문 열리자 열차 타고 고향으로
2010년 04월 19일 (월) 16:30:49 해남신문 hnews@hnews.co.kr

   
 
   
 
서울이나 타지에서 활동하시는 해남출신 주요인물들을 모셔, 고향얘기며 살아오신 삶의 흔적들을 들어 보는 금요초대석. 이번 주에는 도무지 뵙기 어려운 한 분을 만났다. 지난 2, 3년째 노환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신, 해남군 삼산면 창리에 탯자리를 두신 윤주연(尹柱淵 95)옹이다.
10여년전 까지만 해도 3·1절이나 광복절, 혹은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치시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최근 급격이 기력이 쇠해지신 후 침대에만 누워 계신다고 한다. 지하철 8호선, 성남시 남한산성 입구 역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한 다가구주택 2층에 그 분이 계셨다. 1939년 일제의 만행이 극을 달리던 때 당시 재학하던 연희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조선학생동지회'라는 비밀결사를 하다 체포돼 심한 옥고를 치루기도 한, 우리시대에 어쩌면 마지막으로 만나뵐 수 있는 독립투사이시다.
인터뷰는 노환으로 청력은 물론 대화가 자유롭지 못해 곁에서 수발을 해 주시는 부인 나윤자(羅允子 85)여사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또 중요한 내용은 종이에 질문을 써 보여주면 불편한 손으로 대답을 해 주시는 필담을 거쳐 이뤄졌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70년도 더 넘은 의기충천했던 젊은 시절을 꿈 꾸듯 회상하시는 老 지사의 모습은 의외로 장엄하면서도 기개가 넘쳐보였다.

웅변대회 1등, 일제통박하는 내용으로 정학

윤주연옹은 해남 윤(尹)씨 윤선도家의 10대 손으로 부친 尹富浩의 4남4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용머리라 불리던 고향 창리에서 해남읍까지 갈려면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을 들을 만큼 대 지주 집안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형님의 사업실패로 살림이 좀 기울긴 했으나 연희전문시절 왕가인 도정궁(都正宮)에 하숙을 할 정도로 귀하게 자랐다. 해남에서 심상소학교(지금의 해남동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중동중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셨으면 선친께서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계신 것 같은데 선친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곁에서 대답을 거들던 나여사님이 시아버님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 주신다. 광주고보를 다녔던 큰 아들과 함께, 둘째아들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던 선친은 민족계열학교인 중동중학교를 일부러 택해 유학을 보냈다는 것이다. 소학교 시절 해남 고향에서의 추억이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험하고 긴 세월을 살아오신 나이 든 어른 같지 않게, 맑은 눈빛만 보내 올 뿐이었다.

1906년에 설립돼 초대교장으로 독립운동가 오세창선생을 모시기도 한 중동중학교에서 청년 윤주연은 하키선수로 활약하였으며, 폭넓게 친구들을 사귀는 활달하고 패기 넘치는 생활을 했다. 특히 연설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936년 8월 중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전 조선중등학교 웅변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윤옹은 전체 1등을 했는데 평소 조선인 학생에 대한 일인의 차별대우에 적개심을 품어오던 중 일제를 강하게 통박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여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1개월간 유치되는 사건을 겪기도 하며 민족정신을 키워갔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사회경제학과)에 진학한 후 재학시절 일제에 의해 투옥된 사건, 즉 '조선학생동지회'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기력이 쇠해지기 전 이미 한 권의 책을 펴낼 요량으로 잘 정리해 두고 있었다. 140여페이지에 걸쳐 역사적 배경, 동기, 사건의 유래, 정도궁 회의, 남한산성 회의, 동지규합과 운동범위의 확대 등 사건의 전말이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였다.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각성된 영혼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투쟁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족상실의 고뇌가 당시의 거사를 이뤄내게 한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흥교도소에서 취조를 당하면서 겪은 일본경찰의 고문장면에서는 왜 우리가 독립지사들이나 순국선열들에 대해서 마음깊이 존경을 보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케 하였다. 인터뷰 도중 윤옹은 자꾸 손을 등으로 가져가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할머니가 '효자손'을 찾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때 인두로 온 몸에 불고문을 당한 흉터가 지금도 가려워 저렇게 효자손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상실의 고뇌와 번민으로 거사, 세 번 투옥

"내가 시집오기 전이라 그냥 들은 이야기인데 하루는 일본 경찰들이 찾아와 부자들이 돈을 모아 비행기 한 대 값을 내라고 했대요. 시아버님이 '내 자식이 감옥에 있는데 나더러 군량미를 내라고 하냐.' 이러고는 어느 날 저녁 하인들을 시켜서 해남, 강진, 보성 일대 임산부 있는 집들을 찾아 추수한 쌀을 다 내어주었다고 해요. 독립운동하는 아들한테 생활비를 보내주면 그 돈이 어디에 쓰였겠어요. 당신이 직접 하신거나 마찬가지지."

전 광주시장을 지내고 현재 빛고을노인복지재단 원장으로 있는 나무석 원장의 친 누님이기도 한 나윤자 여사는 기억력이 출중하여 옛 사건이나 들은 이야기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함흥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하고 중국으로 가셨다가 용정에서 다시 구속돼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 후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독립지사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직접 듣고 싶은 마음에서 여쭈어 보았다. 나여사님의 이야기로는 처음에 감찰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잠깐 일했으나 그만 두고 광주로 내려와 광주상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5년, 목포 동광고등학교 교장으로 8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다행히 교직에 몸을 담게 되어 정치바람을 덜 타고 무난히 가정을 꾸려낸 셈이었다.

"동광고 교장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 때 목포에서 국회의원을 나왔는데 연설장소를 못 구했어요. 박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무서워서 그랬지요. 그 때 DJ에게 턱! '동광고 운동장을 쓰라'고 빌려준 사람이예요. 저 사람이."

어느 사이에 인터뷰는 윤옹을 제쳐두고 한 세월 분신처럼 동고동락 해 온 나윤자 여사와 나누는 셈이 되어 버렸다.

"그 양반하고 살면서 겪은 이야기는 소설 한 권으로는 다 못 적어요. 바깥 일만 보고 가정사는 모르니 서울로 이사 온 후 내가 20년 동안 시멘트 블록을 찍어 팔아 아이들을 가르쳤다면 누가 믿어 줄랑가?"

윤옹은 지금 살고 있는 성남시가 생기던 무렵부터 살았다. 한 때 국회의원도 출마를 하고 교육재단을 만들어 육영사업에도 뜻을 두었었다. 그러나 다 여의치가 않았고, 큰 뜻에 비해 돌아 온 열매는 씁쓸하기만 한 실패담도 있었다.

2007년 광복회 경기지회장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윤옹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중요한 결정을 한 가지 하였다. 그동안 집안에서 가보처럼 모셔온 이조판서 남파(南坡) 홍우원(洪宇遠)이 숙종에게 올린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고산유물전시관에 기증한 것이다. 시장(諡狀)이란 임금이 내리는 시호를 미리 3개 만들어, 그 중 하나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적은 두루마리 문서로, 윤선도는 이 때 숙종으로부터 충헌공이란 시호를 받게 된 것.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하여 고문서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대의 기념관에 기증한다고 하지만 적잖은 가치를 지닌 문화재급 자료를 내어놓기가 쉽지만은 않았겠네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으로부터 당연히 기증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서인지 서운하다거나 그런 것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셋째아들 윤목씨(강남에서 광고회사경영)의 말이다.

해남 내려오면 녹우당과 천일식당 꼭 찾아


"지금 해남이나, 고향 어디에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신지요. 해남 특산물 중 잡수시고 싶은 것은요?" 노트에 써서 보여드렸으나 말씀을 못하시고 눈을 살며시 감으신다.

윤주연옹은 직접 쓴 소책자에 해방되던 날의 기쁨을 감격스럽게 적어놓았었다. 함흥형무소 문이 열리자 바로 서울로 와 仁村 김성수씨 댁을 찾아가 저녁을 먹고 곧바로 호남행 열차를 탔다고 한다. 고향에 오니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고 아버지는 눈을 감고 말씀을 못하시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일가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은 감옥에서 막 나온 청년 윤주연을 얼싸 안고 울고 웃고 춤을 추었다. 아버지는 모여든 군중에게 막걸리를 몇 석이고 가져오게 하고 돼지를 세 마리 잡아 마음껏 먹도록 잔치를 베풀었다. 이 집안의 아들사랑이 어떠했음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한술 더 떴다. '대흥사에서 매일 냉수로 목욕을 하고 아들의 옥중무사를 기도했다'는 대흥사 주지 甘船月의 말을 듣고 윤주연은 '내 살을 찢고 뼈를 깎아도 부모의 은혜를 못 갚겠다'며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효심을 보였다.

지금 병상에 누워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고향 해남이며 선산과 대흥사 언저리 풍경들이 아닐까. '아버지가 거처하신 사랑채 뒷방에서 토종꿀을 먹고 감옥에서 상한 몸이 회복되어 다시 상경하였다'고 했는데 지그시 감은 눈으로 그 추억들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 윤 목씨는 아버지가 해남에 내려오면 천일식당과 녹우당을 꼭 들렀다고 전해 준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나 눈빛과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어렵게 한 손을 올려 보이신다. 나도 어느 자리보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나왔다.

"부디 오래, 건강하세요."

김원자<편집고문, 언론인 호남대 겸임교수>

   
 
  윤옹이 다녔던 해남심상소학교 제19회 기념사진. 오른쪽 맨 뒷줄 첫번째 인물이 윤주연 학생.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사건은 무엇?

윤주연, 서영원(서재필박사의 손자. 윤주연의 친구) 등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같은 학교 학생인 김상흠, 이동원, 김영하, 민영로 등과 함께 윤주연의 집에 모여 항일결사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한다. 조선학생동지회는 독립투쟁을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거행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면서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고 동경유학생 등 해외 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1930년 이후 집단적 단체를 만들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철저한 관리와 투쟁을 획책하여 첫 출발 훨씬 이전부터 투쟁봉기를 목적으로 생성된 단체였는데, 1930년 이후 단체를 결성하여 항일·저항한 단체는 오직 '조선학생동지회'뿐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학생들은 동경유학생 및 전국 각지의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벽제관 등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 고취와 동지 규합 및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1년 7월 하부조직인 원산상업고등학교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조선학생동지회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조선학생동지회에 가담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 및 전국적인 세포망은 일제히 9월에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당하였다.

윤주연 옹을 비롯한 이들 주모자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1년에서 2년반까지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명예졸업장은 물론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추가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정부에서도 독립운동과 관련한 공훈을 인정하여 조선학생동지회 가담자들에게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