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퇴계학풍을 강진에 전파하다
퇴계 학풍 이은 행당 윤복선생
2011년 04월 01일 (금) 10:01:56 김철 기자 kim72@gjon.com

   
▲ 2002년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203호로 지정된 신도비의 모습.

윤복 선생 탄생 500주년 앞두고 다양한 조명

흔히 다산 선생은 알려져 있지만 호남사림의 한 축을 형성하고 전남 서남권 일대에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전파한 행당 윤복 선생에 대한 지역 자료는 많지 않은 상태다.

내년 행당 윤복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앞두고 후손들이 현창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행당 윤복 선생은 윤효정의 넷째 아들로 1512년 태어났다. 1538년 별사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윤복 선생은 예조정랑, 부안군수, 한산군수, 안동대도호부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30여년 간 공직에 몸 담았다.
 
윤복 선생은 1565년 안동대도호부사 관직을 맡으면서 퇴계 이황 선생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윤복 선생은 종종 퇴계 선생이 강론을 하던 도산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즐겨 들었다.

당시 퇴계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안동에서 머물렀던 시기였다. 퇴계 선생은 후에 조정의 명을 받아 서울에 머물렀을 때 윤복 선생에 대해 학문을 갖춘 참된 선비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어 윤복선생은 1566년 세 아들인 강중, 흠중, 단중을 퇴계 선생의 문하생으로 수업하게 해 퇴계학의 호남전파에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 도암면 용흥리에 위치한 윤복선생 등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모당의 모습이다.

이런 내용은 퇴계 선생이 윤복선생에게 보낸 서찰 26편과 시 1수가 퇴계문집에 등재돼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윤복 선생은 안동향교 건립에 앞장섰다. 2년 간에 걸쳐 대성전을 보수하고 명륜당, 행단 등을 중건했다. 이때 윤복 선생은 안동향교 중수기를 쓰게 된다.
 
안동부사로 일했던 윤복 선생은 건강이 나빠져 1567년 10월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퇴계 선생은 서신을 통해 '호남과 영남은 멀리 아득하게 천리 길이 넘는데도 악수로써 정을 나누며, 이별하기도 또한 불가능함에 한이 더욱 길어지기만 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윤복 선생에 대한 애틋한 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을 보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윤복 선생은 백년서사에 거처하면서 윤항, 윤행 등과 왕래하면서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이어 다시 관직에 복귀한 윤복 선생은 동부승지, 좌부승지, 충청관찰사, 나부목사 등에 임명되기도 했다.
 
퇴계 선생과 함께 학문적 교류를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던 윤복 선생은 관직 중에도 청백리의 공직생활을 이어 30여년 간 당쟁과 연류되지 않았다.

   
▲ 도암면 용흥리에 위치한 해남윤씨 제각의 모습.

1577년 세상을 떠난 윤복 선생은 도암면 귀라리에 묘소가 마련돼 있다가 1628년 현재 위치인 도암면 용흥리로 이장을 하게 된다.

 
현재 선산 인근에는 사당 영모당와 함께 윤복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2002년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203호로 확정된 신도비는 행당선생의 일생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신도비는 처음 1698년경 세워졌다. 전서는 사헌부 대사헌 권규, 비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오시복이 썼다. 하지만 이 신도비가 훼손돼 1822년 다시 세운 것이다.

윤복 선생의 후손 윤종겸이 비문을 쓰고 윤규로가 전서를 써서 다시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는 독특한 형태로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원래 비문은 전면과 후면에 넣고 후손들이 추가로 넣은 추기문은 좌측면과 우측면에 기록하고 있다.

또 퇴계선생이 윤복 선생에게 보낸 시를 따로 새겨 넣은 것은 색다른 특징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인 신도비와 달리 비석위에 올리는 이수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섬세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다.
 
윤복 선생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남아있는 것이 많치는 않다.

하지만 퇴계 선생과 교유하면서 아들들을 조선 최고의 지식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윤복 선생의 아들들은 다시 강진으로 돌아와 퇴계학을 전파하는 가교역할을 맡아서 활동했다.

또 1830년부터 시작된 윤복 선생의 문집발간 기획과 함께 그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안동의 퇴계후학들과 교류하면서 강진에 선진 학문이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윤복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앞두고 퇴계학의 교류에 앞장서고 호남사림의 한 축을 맡았던 윤복 선생의 발자취를 다시 되짚어보고 이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인터뷰┃윤복선생 14대손 윤재곤 씨 - "윤복할아버지는 해남윤씨뿐 아니라 강진의 큰 자랑"

   
윤복 선생의 14대 후손으로 윤복 선생의 현창사업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윤재곤(74)씨를 만났다.

윤 씨는 "윤복 할아버지는 이조 당쟁이 심했던 시기에 청백리 생활을 하면서 당파와 관계없이 30년 간 공직생활에 몸 담았던 조상"이라며 "강진이 다산 선생의 유배지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생활했던 부분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윤 씨는 "윤복 할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퇴계학을 전라도 서남부 지역에 전파시킨 것"이라며 "당시 학문적으로 이름이 알렸던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과 동연배로 서로 교류를 하면서 지냈을 정도로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밝혔다.
 
현창사업에 대해 윤 씨는 "각 대학 등을 찾아다니면서 윤복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며 "종친들의 협의를 거쳐 내년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해 퇴계학의 전파한 윤복 할아버지를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에 대해 윤 씨는 "종친들과 재원을 마련해 내년 사이에 학술세미나를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며 "퇴계 선생과 만났던 안동, 많은 종친들이 생활하는 서울, 생활했던 강진 등 3곳에서 세미나를 개최해 윤복 할아버지를 알리겠다"고 강조했다.

 

출처 : 강진신문

http://www.gjon.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