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북의 「탐라록」 냉정한 눈으로 제주 현실 묘사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82. 석북 신광수
2011년 04월 11일 (월) 20:44:04 제민일보 webmaster@jemin.com

제주 풍토와 민속, 당시 도민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어
현실주의 시 <제주걸자가>, 제주 거지 주제로 시 쓴 것 매우 드문 일

# 과거 볼 때 먹점을 치는 석북

   
 
  석북집  
 
제주바다를 오갔던 수많은 관리(官吏), 적객(謫客), 문인(文人)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시문(詩文)을 지었다. 그들의 문집은 오늘날 제주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짧은 기간 제주에 머물면서 제주에 관한 시를 많이 남긴 이가 바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다. 자는 성연(聖淵), 본관은 고령(高靈). 그의 부인 해남 윤씨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딸이다.

공재 윤두서는 조선 숙종 때 선비화가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 뻘이 된다. 그는 평생 이렇다 할 벼슬을 하지 않고, 오로지 그림과 학문에 전념하다가 45세에 해남으로 낙향, 48세에 타계하였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공재 윤두서 고택(古宅)에 소장된 도서를 정리한 것이 모두 2635부로 대부분 희귀본이다. 필사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공재의 둘째 부인 전주 이씨는 제주목사였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형 이형징(李衡徵)의 딸이다. 공재는 이형상에게 제주도 문물에 관해 자세히 물었으며, 이형상은 1704년 《남환박물(南宦博物)》을 공재에게 보내 이에 답하였다.

석북은 서울 가회방(嘉會坊) 재동(宰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20세에 호남에 머물며 오달윤(吳達運), 이언근(李彦根) 등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26세에 대둔사(大芚寺) 팔상전(八相殿) 상량문을 지었다. 30세에 승보시(陞補試), 35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는데, 그때 과시(科試)인 <관산융마(關山戎馬)>가 가사(歌詞)로 널리 불려졌다.

39세에 진사, 45세 부인 윤씨가 사망하자 이후 과거 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50세에 영릉(寧陵) 참봉에 제수되어 여강(驪江)으로 가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52세 사옹원 봉사 때인 1764년 1월, 그는 죄인을 호송하는 금오랑(金吾郞) 신분으로 제주에 와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려 했으나 배를 띄울 때마다 표류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4회, 40여 일 동안 바람을 기다리면서 시문 58제(題)를 남겼다. 그것을 모은 것이 《탐라록(耽羅錄)》이다. 금오(金吾)는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으로 왕부(王府)라고도 하며,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하고, 관리·양반·강상(綱常)의 특별재판소 역할을 담당한다. 금오랑은 의금부의 종5품 벼슬인데 의금부도사라고 부른다.

<행장(行狀)>에 의하면 《탐라록》은 《부해록(浮海錄)》으로 알려져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4월 선공감 봉사, 54세 예빈시 직장, 55세 겨울 돈녕부 주부(主簿)가 되었다. 59세에 서부도사(西部都事)를 역임, 60세 연천(漣川) 현감이 되었다.

1772년 61세가 되던 1월,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승지가 되었다. 당시 4인의 승지가 모두 기로방(耆老榜) 출신이라 금상(今上, 영조)이 '사호각(四皓閣)'이란 편호를 써서 승정원에 걸게 하였다.

62세가 되던 1773년 9월 영월부사(寧越府使)가 되었으나, 고을의 아전과 토호들의 모략으로 폄직(貶職)돼 돌아왔다.

1775년 2월, 64세에 우부승지가 되었다. 응제(應製)에 합격하여 왕으로부터 표범가죽(豹皮)을 하사받았다. 그 후 일변(日變)에 관해 장계를 올렸다가 파직 당했다가 4월에 다시 장릉(長陵) 제관으로 차출되었다. 이때 비를 맞고 심한 감기에 걸려 4월 26일 사망하였다. 1906년 5세손 신관휴(申觀休)가 활자본 《석북선생문집(石北先生文集》을 간행하였다. 1973년 신석초(申石艸)가 펴낸 《석북·자하시집》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 외 다수의 시들이 빠져있다. 석북은 신석초 시인의 7대조다.

석북은 과거를 볼 때마다 먹으로 점을 치는 버릇이 있었다. 청성(淸城)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淸城雜記)》에, 석북이 먹점을 치는 방법이 나온다. 석북은 먼저 "마음을 태허(太虛)에 두노라"라고 축사를 쓴 뒤 아무렇게나 먹을 찍어, 어지럽게 찍힌 점들을 두 개씩 묶으면서 '된다', '안 된다'로 세어서 끝에 '된다'로 끝나면 길하고, '안 된다'로 끝나면 불길하다고 점을 치는 것이다.

# 석북의 <관산융마(關山戎馬)> 기생의 애창곡

   
 
  공재 윤두서 고택  
 
무능(無能)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지은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는 조선 기생의 역사(朝鮮妓生史)를 기록한 책이다. 거기에 '평양기생이 <관산융마>를 잘 부르다'라는 제명(題名)이 있는데, <관산융마>는 1745년 석북이 35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2등으로 급제한 시다. 원제(原題)는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 악양루에 올라 관산융마를 탄식하노라)>이다. 당시 과거의 시제(試題)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악양루에 올라 고국의 전란을 비탄하며 지은 <등악양루(登岳陽樓)>였다. 석북이 지은 시는 급제와 동시에 세상에 널리 퍼졌고, 특히 기방(妓房)의 명곡으로 200년 동안 가창되었다.

시는 36구로 되었는데 애향심, 연민사상, 충군애민, 조국애로 구성되어 있다.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가득 차고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니, 평양 기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평양 기생 목단(牧丹)이 처음으로 노래했는데 소리와 곡조가 매우 처량하고도 맑았다. 여러 기생들 사이에 유행되어 20세기까지 애창되었고, 멀리 중국에서도 이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다음은 <관산융마(關山戎馬)>의 일부 가사다.

 "오, 만(灣)에 지는 해, 난간에 의지하여 시름 잠긴다.
 어느 때나 북쪽의 전쟁이 끝날까.
 꽃 피는 봄날 고향에 눈물 뿌리며 떠나고 나서
 어느 곳 강산인들 내게 시름 안겨주지 않으리."

# 제주의 가혹한 현실을 말하다

   
 
  석북과 해남 윤씨 묘  
 
석북의 《탐라록》에 보이는 시는 비록 4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풍토와 민속, 당시 도민들의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 <민황(憫荒)>은 흉년 든 제주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돌밭에 잦은 햇볕 섬 백성들은
 연중 배가 고프네,
 온 고을에 흉년이 들어 처량하구나.
 옛날부터 어염(魚鹽)으로 장이 서지 않는 나라
 지금처럼 비바람에 뱃길 끊긴 때.
 장모진(長毛鎭) 역졸들은
 관아 부엌에서 고기를 훔치고
 누렇게 부황 난 아낙네는 나무껍질을 벗기네.
 내 또한 왕의 신하로 이곳에 와
 매번 아침 저녁 식사 대할 때마다
 절로 숟갈 멈춘다.

또 <해신제(海神祭)>라는 시는 '배 위에서 촛불을 켜고 용왕에게 제를 지내는 모습'을 읊고 있다. 그의 시들은 제주의 토풍(土風)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가죽옷 입고 배를 맞는 100살 늙은이', '털벙거지 쓴 조방사(助防使)의 환영', '우는 흰 꿩', '허하게 놓아먹이는 대완마(大宛馬) 종자들', '해 맑은 갯마을에 홍교무(紅蛟舞, 제주의 춤인데 미상)', '하포(下浦, 제주사람들이 관에 머물며 바람을 기다리는 것)', '청작선(靑雀船, 배 앞에 나무로 새를 만들어 청색을 칠한 것)', '제주의 기생이 귤을 가지고 문병 옴', '사투리는 가늘고 급하고', '허벅으로 물 긷는 섬마을 아낙', '밭담을 쌓는 말 테우리 집', '남장(男裝)하고 말을 능히 타는 관기(官妓)', '제주성(城)에 등자(橙子)나무를 심어 등자성이라고 부르는 것',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뱃사람', '메추라기 같이 털옷 입은 벼슬아치', '이별가로 상사별곡(相思別曲)을 부르는 기생', '물결이 누(루, 연해지방의 방언)를 일으킨다' 등이 그것이다.

노래풍의 가사(歌詞)는 세 편인데, <한라산가(漢拏山歌)>, <잠녀가(潛女歌)>,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 등이다. <한라산가>는 한라산에 오르려고 했으나 풍우가 심하여 올라가지 못해 그냥 바라보고 지은 작품이라고 한다. <잠녀가>는 잠녀들의 괴로운 물질과 고달픈 일상을 지켜보고 쓴 시로, 석북은 "팔도에 진공(進貢)하고, 한양에 올려 보내자면 하루에 몇 번이나 전복을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어이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농락하여 식욕을 채울까보냐. 아서라. 우리 같은 가난한 선비들은 해주(海州) 청어도 제대로 못 얻어먹으니 하루 밥상에 부추나물만 올라와도 흐뭇하구나"라고 하여 선비의 양심을 드러내고 있다.

<제주걸자가>는 현실주의 시이다. 많은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주제를 물리고, 제주의 거지들을 주제로 시를 썼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시는 석북의 가치관이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으로 후일, 이런 그의 모습은 영월부사(62세)로 있을 때 백성의 편에서 아전과 토호를 징치하다가 좌천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출처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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