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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및 본관 유래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는 윤존부(尹存富)입니다.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고려중엽에 이미 발상(發祥)한 고족(古族)이나 황공하게도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를 비롯한 선계7세(先系七世)는 관력(官歷)과 배위급묘소(配位及墓所)를 거의 실전(失傳)하였으며, 고려말(麗末)에 이르러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께서 대호군공(大護軍公) 단봉(丹鳳)과 소윤공(小尹公) 단학(丹鶴) 두형제를 두신 후로 지금까지 6백여년 동안 자손이 번창하여 8파(八派)를 형성하고, 강(康) 해(海) 영(靈) 장(長)등 여러 고을에 집단세거(集團世居)하면서 문장도덕(文章道德)과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세세환혁(世世煥爀)하여 호남망족(湖南望族)의 반열(班列)에 오르니 오로지 열선조적후여음(列先祖積厚餘蔭)의 비호(庇護)하신 소치(所致)로다.
 

 

 

   1.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유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11세기인 고려 중엽 문종(재위 1046~1083년)때에 생존하셨던 분입니다.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부터 6세 환(桓) 까지는 생존년대(生存年代), 관직(官職), 배위(配位), 세덕(世德) 등의 기록은 없고, 다만 휘(諱)자만 전해오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해남윤씨는 선대(先代)의 유적과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는데, 그 연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규명해야할 역사적 과제이며, 분실된 유적과 문헌이 많다보니 시조로부터의 발상유래(發祥由來)가 짧게 기록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인 기록이 보인 것은 7세 녹화(綠和)부터입니다.

   우리 해남윤씨는 문헌상 최초의 기록(보물 483호)을 가지고 계시며,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사온서직장(司署直長)을 지내신 8세손(八世孫)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을 이후에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2. 발상지(發祥地) 및 본관(本貫) 유래에 대한 연혁지(沿革誌)  

 

     우리 선대조고부군(先代祖考府君)의 묘소(墓所)가 모두 강진(康津), 해남(海南)관내에 모셔 계심에 비추어 우리의 선대조고부군(先代祖考府君)의 세거(世居)가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임을 말하는 것이며, 중시조(中始祖) 광전(光琠)에 관한 탐진(耽津:전남 강진의 옛 명칭) 감무(監務)의 증명서류가 이를 입증하기에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발상지(發祥地)는 곧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본 지역의 연혁(沿革)을 보다 깊이있게 알아둘 필요가 있기로 부록(附錄)합니다.(原文末尾 加削)

      海南古之塞琴縣一名浸溟<古號曰棠岳즉今縣山面古縣里前一小岡之名以棠山者是也 與地勝覽人物卷海南條初無海尹我尹氏之姓貫海南姑未知始於何代也>康津本道康耽津二縣也 道康本百濟之道武郡新羅改爲陽武高麗改爲道康耽津本百濟之冬音縣新羅  文武王時耽羅星子來朝船泊于今九江浦故因改以耽津屬陽武郡<耽羅國號耽羅以其來泊耽津記云國朝新羅也與此異雪>本朝  太宗十七年徒兵馬營于道舊治合縣改號康津以耽津爲治所<卽今縣治 世宗十一縣治徒居道康之松溪今所爲古邑也 成宗六年還耽津舊治所>別曰金陵曰鰲山<尹氏先代墳墓皆在康津子孫世居故仍爲付錄>而 

   *. 해남(海南)
      해남은 옛날에는 색금현(塞琴縣) 또는 침명(浸溟)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당악(棠岳)이라고도 불렀으며, 당악(棠岳)은 지금의 전남 해남군 현산면(縣山面) 고현리(古縣里) 앞에 있는 작은 산등성이로 이 산을 당산(棠山)이라 했는데 당악(棠岳)은 여기에서 비롯된 지명입니다.

여지승람 인물권 해남조(與地勝覽 人物卷 海南條)에는 해남윤씨(海南尹氏)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해남윤씨의 성관(姓貫)을 해남(海南)이라 함은 어느 시대부터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 강진(康津)
      강진은 본래 도강(道康) 탐진(耽津)의 2현(二縣)이었다. 도강은 백제때는 도무군(道武郡) 신라때는 양무군(陽武郡) 고려때는 도강(道康)이다. 탐진(耽津)은 백제때는 동음현(冬音縣) 신라때는 탐진(耽津)이라 했음.

   *.<탐진 개칭 사유 - 신라 문무왕(文武王)때 탐라국(耽羅國: 지금의 제주)왕자가 신라국에 래조(來朝)했을 때 강진 구강포(九江浦)에 정박하였다 하여 탐진으로 개칭(改稱)하고 양무군에 예속시킴.  강진이라 개칭 - 이조 태종 십칠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둠<지금 병영면> 도강, 탐진을 합하여 강진이라 하고 치소(治所)는 탐진에 둠.
     <세종 십일 년에 치소를 송계(松溪:지금의 성전면 수양리 땅골)로 옮기고 고읍면(古邑面)이라 함. 성종6년(成宗六年)에 치소를 다시 옛 탐진으로 옮김.
       강진의 또다른 지명은 금릉(金陵) 또는 오산(鰲山)이다.
 


☞.
우리 해남윤씨가 지리지 성씨조에 최초로 나타나는 때는 1760년(英祖 36)에 만들어진 「여지도서(與地圖書):下, 全羅道 海南郡 姓氏條 」입니다.

☞. 해남군 연혁에 의하면 해남(海南)은 1448년(세종 30) 황원현, 옥산현, 죽산현과 병합, 당악(棠岳)으로 개칭하여 잠시 사용하다가, 다시 해남현(海南縣)으로 개칭하였습니다. 해남이란 관향(貫鄕)은 지금의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 앞 당산(棠山)을 인용 당악(棠岳)이란 고현명(古縣名)이라고만 적혀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와 연관이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3. 해남윤씨의 중흥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서직장(司署直長)을 지내신 8세손(八世孫)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은 강진에 터전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 족보에서 중시조(中始祖) 광전(光琠)의 아들은 단봉(丹鳳)과 단학(丹鶴)이며, 단학(丹鶴)은 차자(次子)인데 부친 광전(光琠)으로부터 봉사조(奉祀條)의 노비(奴婢)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제사(祭祀)가 차자(次子)인 단학(丹鶴)에게 물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때에 장자(長子) 단봉(丹鳳)은 이미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이 시기에 우리 해남윤씨는 신흥무장세력으로 성장하여 무관직을 역임하였습니다.

      단봉
(丹鳳)천우(天祐)와 천길(天吉) 두 아들을 두셨으며, 단학(丹鶴)은 다시 사보(思甫)와 사서(思瑞) 두 아들을 두셨습니다. 사보(思甫)께서는 종(種), 경(耕)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후 경(耕)은 강진 덕정동에 살며 효인(孝仁), 효의(孝義), 효례(孝禮), 효지(孝智), 효상(孝常), 효원(孝元), 효정(孝貞)의 일곱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중 막내아들인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1476-1543)이 당시 해남의 강력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졌던 대부호 정귀영(鄭貴瑛)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어 해남으로 옮겨 살 게 되었고,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효정(孝貞)은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행세하게 되었습니다. 어초은(漁樵隱)이란 호처럼 물외한정(物外閑情) 탈속의 경지에서, 번거로운 세속에 쫓김이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자연을 벗할 뿐, 자신을 보다 깊고 넓은 세계로 인도하여 국가에 세금을 못내고 옥에 갇혀 신음하며 죽어가는 팔도(八道)의 불쌍한 백성들을 국가에 막대한 세금을 세 번이나 대납하여 구제(救濟:三開獄門)하였던 관인후덕(寬仁厚德)한 적덕(積德)의 유교적 덕치(德治), 인정주의(仁政主義)를 펼침으로 인해 조선 팔도 민간 속에 적선지가(積善之家) 해남(海南) 윤가(尹家)라는 인식의 틀을 구성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효정(孝貞)은 학문적으로는 자신의 처사촌 동서인 영남 사림파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 최부(崔溥 : 1454 - 1504)와 사승(師承) 관계를 맺으면서 사림으로서 입지를 넓혀 양반가로서 정계 당파성을 확보함과 아울러 해남(海南) 윤가(尹家)라는 본관(本貫)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효정(孝貞)의 자손들은 사림의 주류를 이루는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지는 문적계통을 확보함으로서 양반 가로서의 맥을 확실하게 이루게 되었으며, 효정(孝貞)의 장자 구(
衢:귤정공)와 복(復:행당공), 손자 홍중(弘中), 의중(毅中)과 증손자 유기(唯幾), 유심(唯深), 그리고 고손자 선도(善道)로 이어지는 자손들이 학문과 벼슬이 출중해짐으로 인해 그의 선대에까지 나라에서 벼슬이 추증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으며 아울러 재지사족 호남 명문가로서의 우리 해남(海南) 윤가(尹家)의 입지가 이루어 졌습니다.

 

 

 

 

 집성촌

 
     전남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전남 강진군 강진읍 춘전리
     전남 해남군 해남읍 평동리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덕정동, 지석리, 만덕리, 계라리, 항촌리
     전남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     

 


 
해남 연혁---<해남군청 자료 참조>

   선사시대
      
- 신석기시대 후기에 즐문토기인이 현산면 두모리에 출현
      - 삼한시대에 마한 54국중 소위건국등 4~5개의 마한소국세력 성립
   삼국시대
      - 백제성왕 16년(538년) 새금현(塞琴縣),고서이현,황술현 설치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년) 3현의 이름이 침명(浸溟),고안,황원으로 개칭됨
   고려시대
     -. 태조 23년(940년) 침명현을 해남현, 고안현을 죽산현으로 개칭하고 황원현은 황원군으로 승격
   조선시대
     -. 태종 9년(1409) 진도와 해남을 합하여 해진군으로 함
     -.             (1412) 읍의 치소를 지금의 현산면 고현리의 당악에서 영암으로 옮김.
     -. 세종 19년(1437) 진도와 해남을 나누어 해남현을 복설하고 치읍을 현재의 해남읍으로 옮김
     -. 1448년(세종 30), 황원현, 옥산현, 죽산현과 병합,
당악(棠岳)으로 개칭, 다시 해남현으로 개칭.
     - 고종 32년(1895) 전국 행정개편되고 따라 해남현이 나주부 해남군으로 승격
     - 1896년 다시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하고 부근도서를 완도군으로 이속
   현재
     -. 1914년 해남 인접지역을 병합하여 13개면으로 개편
     -. 1955년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1읍 12면)
     -. 1983년 북평면을 나누어 북일면 신설 1읍 13면으로 편제
     -. 1992년 현재 1읍 13면 513리로 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