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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산 한천동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해남윤씨 3대 유적지

                        
한천동(寒泉洞) 시원(始源) 도선산(都先山)

                        
덕정동(德井洞) 세거시원지(世居始原地)

                        
연동(蓮洞) 500년 요람지(搖籃地) 

 


 

 

 

 

 

 해남윤씨 시원과 도선산 한천동

 


     사람이 지구상에서 살아온 역사는 길지만 그 살아온 역사에 비하면 기록으로 보존한 역사는 짧습니다. 그것은 인지(人智)가 발달하지 못한 원시사회의 생활이 길었고 문자가 발명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무쌍한 자연계는 사람의 삶을 위협하는 재난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천재지변의 재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힘보다는 여러사람의 힘이 합해져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을 합하는 기본 모체가 혈록(血綠)으로 뭉친 부족사회 즉 씨족사회(氏族社會)입니다.

      인지(人智)가 발달됨에 따라 자연과 싸워 이겨낼 방재도구와 생활용구를 개발하게 됐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문자와 기록용구를 발명하여 여러 생활상들을 기록보존하면서 귀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류의 역사적 기록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적 기록은 국가단위의 기록부터이고 사가(私家)에서는 가첩(家牒), 가승(家乘) 등의 기록만 있었습니다. 씨족의 가계(家系)나 생활상 및 세덕(世德)을 기록한 족보(族譜)도 중요한 역사적 기록임을 인식하고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400여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중국에서 모방하여 왔고, 고려 중엽에 왕실족보(王室族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민가에서 씨족의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왕조 세조(世祖)때 즉, 중국의 명(明)나라 성화년간(成化年間:1465~1487)에 만들어진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 성화보(成化譜)가 처음인데 족보서문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족보로써 체계를 갖추어 발간한 것은 조선 명종(明宗) 17년(1562) 중국 명나라 가정(嘉靖) 41년에 만들어진 문화유씨(文化柳氏) 족보가 가장 오래된 족보라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회는 혼란하고 문헌이 많이 유실됨에 따라 족보에 대한 관심도 일시 침체되었습니다. 숙종년대(肅宗, 1675~1720)에 이르러 많은 씨족들이 족보를 만들 게 되었습니다.

     우리 해남윤씨의 족보도 이때 즉, 숙종 25년 임오년(壬午年)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임오보(壬午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잠깐 성(姓)을 갖게된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성을 쓰지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신라 말기에 중국의 예를 본받아 귀족계급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 풍습은 고려조에도 계속되어 왔는데 고려 문종조(文宗朝: 1047 ~1082)에 이르러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함에 따라 성씨가 갑자기 많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본관을 쓰게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보아집니다. 그때는 성씨는 써도 족보는 기록하지 않다가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명종(明宗)때부터 임을 감안하면 특별한 가계이외에는 일천년전의 족보를 기록 보존하여 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처음 족보를 편찬할 적에는 가첩, 가승 및 여러 기록 문헌들을 수집하고 구전 등을 모아서 엮었을 것입니다. 기록이 잘 보존된 씨족은 시조의 발상유래를 멀리까지 기록할 수 있었고, 기록 보존이 잘 안된 씨족은 시조의 발상유래가 짧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짧을수록 정확도는 높고 길수록 정확도는 떨어질 것입니다. 기록이 유실된 경우는 천재지변과 인재(전란, 화재, 기타)등 여러 재난을 당하면서 일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해남윤씨의 선대의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는데, 그 연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규명해야할 역사적 과제이며. 분실된 문헌이 많다보니 시조로부터의 발상유래가 짧게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조 윤존부(尹存富)부터 6세 환(桓)까지는 생존년대 관직 배위 세덕 등의 기록은 없고 다만 휘(諱)자만 전해오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록이 보인 것은 7세 녹화(綠和)부터입니다. 우리 선세는 8세 광전(光琠)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습니다. 벼슬은 고려사온직장영동정(高麗司
直長令同正)을 지내셨는데 둘째 아들 단학(丹學 : 군기소윤)에게 노비를 허여하고 이를 입안한 고문서가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입안한 관어(官御)가 탐진(耽津:지금의 강진)으로 되어있어 우리의 선대가 강진지역에 살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고려 공민왕3년(1354)에 입안한 이 문서는 고려조의 급비문서(給婢文書)로는 우리 나라에 유일하게 보존된 귀중한 사료로서 보물 483호로 지정되어 연동유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시조공(始祖公)의 생존연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연대를 추산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1세를 30년으로 보고 7세를 거슬러 올라가 추정해보면 고려 제11대 왕 문종연대(재위 1046~1083)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세연대(在世年代)를 알 수 없는 이하 6위 선조도 이런 방식으로 재세연대를 추산해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묘도 비조(鼻祖)부터 9세까지 실전(失傳)되었는데 순치연간(順治年間, 조선조 효종 현종연대)에 전부(田夫)가 계하(階下)까지 개간하다가 고려사온직장영동정공(高麗司
直長令同正) 휘 광전(光琠) 및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 휘 단학(丹學)의 지석(誌石 : 묘주의 이름을 새겨 묘앞에 묻은 돌)이 개간하던 삽에 딸려 나왔습니다. 그때 한천동에 사시던 처사공(處士公) 부자(휘: 唯益 善五)가 보시고 그 지석을 잘보관하라 일렀는데, 전부가 무식하여 여기 저기 던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지석을 찾지 못하여 상하(上下)로 부자(父子)분의 신위(神位)를 정하지 못하고 묘(墓)를 썼습니다. 후손들이 민망이 여겨 강희연대(康熙年代, 조선조 현종 숙종연대)에 여러 자손들이 발의하여 묘아래 제각을 짓고 제각에서 동서로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祭祀)를 모셔왔습니다. 대호군공(大護軍公)의 향사(享祀)를 올리지 못한 것이 송구스러워 제파(諸派)가 협의하여 무신년(戊申, 1848) 가을부터 제각에 세분의 신위(神位)를 차례대로 모시고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습니다. 함풍(咸豊) 무오년(戊午, 1858) 2월에 묘전에 비(碑)를 세우고 위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서기 1961년 9월에 개수(改竪)하였습니다.

    서기 1981년에 중앙종친회가 앞장서서 이때까지 궐위했던 시조공(始祖公) 이하 7세까지를 설단봉사(設壇奉仕)키로 발의함에 각파 문원(門員)들의 대찬성으로 거액의 성금을 모아서 한천동(寒泉洞) 제각 후원에 단(壇)을 마련하고 단비(壇碑)와 상석(牀石)을 갖추었습니다. 주변은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헌납한 조경수와 잔디로 단장하여 우리 종족들의 선조 추모의 성역(聖域)으로 만들어 매년 음력 9월 10일 단제(壇祭)를 모시고 있습니다.

     사온직장영동정공(司
直長令同正公)과 군기소윤공(軍器少尹公)의 지석이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호군공(大護軍公)의 묘도 그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고증할 길이 없어서 봉분(封墳)하지 못하였습니.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자손으로서는 송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어 서기 1990년 봄에 제손(諸孫)들이 협의하여 이미 성분(成墳)된 부자의 묘소 옆에 초혼장(招魂葬)으로 봉분하였습니다.

     위와같은 과정을 거쳐 강진군(康津郡) 도암면(道岩面) 계라리(桂羅里) 덕음산하(德陰山下) 한천동(寒泉洞)에 안장된 선조들의 묘소는 해남윤씨의 도선산(都先山)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형을 살펴보면 영봉 덕암산(德岩山)을 주산으로 하고 좌청룡 우백호가 겹으로 잘 짜여져 있고 주작으로는 소야평 (小野坪) 건너 석문산(石門山)과 풍덕산(風德山)이 둘러서 있습니다. 동편에서 흐르는 맑은 물은 한천동을 감고 돌면서 대성문수구(大城門水口)로 빠져나가 항촌만(項村灣)으로 흐릅니다. 한천동(寒泉洞) 동천(洞天)앞에는 방지(方池)가 있었고 못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어 그윽한 운치를 자아내고 그 옆에는 명천이 있어 참샘이라 불리었습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고 옛 정취를 찾을 길 없으니 아쉽기만 합니다. 문중에서 복원하자는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거대한 사업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착수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천동(寒泉洞)은 산세(山勢)와 형국(形局)이 잘짜여져 있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굴지(屈指)의 명지(名地)로 알려져 있습니다.

     묘하에 있는 제각(영모당)은 숙종 14년(1688)에 건축한 고건물로 5간 제각과 제직사, 자손유숙실, 대문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웅장한 건물로서 제각건축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지방문화재(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건물보수 등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한천동(寒泉洞) 입구에는 해남윤씨의 도선산(都先山)임을 알리는 세천비(世阡碑)가 서 있습니다. 한천동(寒泉洞) 도

선산(都先山)은 덕정동(德井洞), 연동(蓮洞)과 더불어 해남윤씨 3대 유적지 중  하나입니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해남윤씨의 후예들은 여기에 모여 문사(門事)를 의논하고 숭조사상(崇祖思想)을 함양하고 묘역을 가꾸고 추제(秋祭)때는 많은 후손들이 모여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