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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 500년 요람지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해남윤씨 3대 유적지

                        
한천동(寒泉洞) 시원(始源) 도선산(都先山)

                        
덕정동(德井洞) 세거시원지(世居始原地)

                        
연동(蓮洞) 500년 요람지(搖籃地) 

 


 

 

 

 

 

 연동 500년 요람지(搖籃地)

 


      어초은공(漁樵隱公)께서 해남에 사시게 된 동기는 호남사림의 큰 맥을 형성한 금남(錦南) 최부(崔傅)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공께서는 두뇌가 명석하여 글 공부도 잘 하셨지만 인품이 준수하였는데 해남의 갑부 정호장(鄭戶長 휘 귀영)이 공을 보시고 장차 큰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시고 공을 사위로 삼으셨습니다. 공께서는 정호장댁 따님과 혼인하게 되면서 해남에서 영주하게 되셨습니다. 여러 형제분들중 유일하게 해남에서 살게 되었고 해남땅에 새로운 세거지를 마련한 분입니다.      공께서는 1501년 이수정방(李守貞傍)에 생원시에 합격하셨으나

관계에 나갈 것을 포기하시고 후학과 농업경영에 힘쓰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문을 모르는 해남지방을 문향(文鄕), 예의지향(禮儀之鄕)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선생이 쓴 금남(錦南) 최부(崔傅)선생 행장(行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께서는 유재(幽齋) 임우리(林遇利),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선생과 함께 해남 후학을 가르켜 크게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당대의 명유(名儒)로 알려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도 동년배로 정분을 두터이하며 교류하였다는 문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처가인 정호장댁은 미암 산하 성북(城北)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영주(永住)할 세거지로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라는데 어릴적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야 훌륭한 인재로 키울 수 있다는 생각하에 백방으로 새 집터를 찾던 중 당시 도강(道康) 김씨(金氏)가 살고 있던 해남읍 근교에 있는 백련동(白蓮洞 : 지금의 터)를 발견하시고 여기면 후손들이 영주할 수 있는 요람(搖籃)의 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터를 사서 새로운 세거지로 마련하셨습니다.

     그 터를 살펴보면 남쪽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명산 월출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해남 땅에 이르러 그 지맥의 한곳에 우뚝선 산봉우리를 마련하였는데 그 산이 영산 덕음산(德蔭山)이요, 그 산밑에 자리잡은 마을이 백련동(白蓮洞)입니다. 백련동은 덕음을 진산으로하여 좌청룡 우백호가 잘 짜여져 있고, 주작으로는 가까이 필봉을 위시하여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멀리는 대흥사 절터를 마련한 두륜산으로부터 병풍산이 둘러 서있습니다. 청룡등 밖 노저골에서 흐르는 물은 내려오다 작은 저수지를 만들고 다시 연동 마을 앞을 지나 백호등을 감고 돌다 서해바다로 흐릅니다. 덕음산에서 바라보면 해남팔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풍수지리학자나 세인들은 연동을 만년불파지지(萬年不破之地)의 명당이라고 일컬어 오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여기에 자손들이 살아갈 가옥을 신축하시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 세거지로서의 기반을 튼튼히 하셨습니다. 그때 건축한 고택은 500년 동안 지금도 보존되어 있고, 고산공께서는 수원에 사실 적에 효종대왕께서 스승인 고산공에게 하사하신 집을 이축한 행랑 녹우당이 340년 동안 이어오고 있습니다.

     고택 안채와 사랑채가 口자형으로 지어졌는데 호남지방 사대부집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어 국가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고택 뒤 비자나무 숲 아래에는 어초은공의 유택이 있고 묘하 동편으로는 어초은공사당과 고산공사당이 있고 담장 안에는 가묘가 있습니다. 서편으로는 웅장한 건물 추원당이 있는데 자손들이 여기에 모여 숭조정신(崇祖精神)을 드높이 문사의론(門事議論)합니다.

     고택 아래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4,6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유물전시관 옆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습니다.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 241호로 지정된 500년된 비자나무 숲과 어초은공의 아들 4형제(귤정, 해빈, 졸재, 행당)가 기념수로 심었다는 400년된 은행나무와 노송들, 그리고 동네입구에 조성된 연못들이 잘 조화되 주변경관이 가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초은공께서는 처가에서 물려받은 많은 재산과 농업경영을 잘하셔서 당대 갑부가 되셨는데 가난한 사람들 돕는 일도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나라의 세금을 대신 납부하여 출옥(出獄)시켜 주었습니다. 이와같은 일을 세 번이나 했기 때문에 삼개옥문(三開獄門)의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문헌상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공께서 바련한 튼튼한 경제적 기반, 인걸은 지령이라는데 고색창연한 고택과 호연지기를 길러 줄 수 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세와 주변환경은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데 공께서 베푸신 많은 구휼사업(求恤事業) 등 은덕에 힘입어 후손들 중에 문장세덕(文章世德), 충효절의(忠孝節義), 예의지절(禮儀之節)을 갖춘 명현과 명경들이 많이 나왔다고 보아집니다.

     연동에는 국보를 비롯하여 많은 보물, 지정문화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조때 노비문서, 3,000점에 이르는 고문서 등이 유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어 국가가 관리하고 있는데 학자, 학생,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살펴봐도 잘짜여진 집터와 500년된 고택, 국보를 비롯한 주요유물 등이 연동처럼 많이 소장된 곳도 없다고 합니다.

     한천동, 덕정동, 연동은 해남윤씨 3대 유적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후손들은 성묘와 봉심(奉審)을 부지런히하고 유적 발굴 및 연구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