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금구의록

 

 사적 및 문헌

 


 

 

 

   우리 해남윤씨에 전해오는 사적 및 문헌을 살펴보면 6세조 환(桓)과 관련된 사적, 금구의록, 금구현정단자가 있으며, 중시조 영동정공에 관련된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들 자료들은 해남윤씨와 관련된 최초의 자료들로써 그 의의가 깊고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1. 환(桓)에 관한 자료는 우리 해남윤씨 윤환(尹桓)과 칠원윤씨의 윤환(尹桓)이 휘(諱)자가 같아서 혹시나 해남윤씨와 칠원윤씨가 근본(根本)이 같지않나 하였으나  여지승람과 칠원윤씨족보등을 살펴보건데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용이며, 또한 전북 김제 금구에 있다는 환(桓)의 묘소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2. 중시조 영동정공(令同正公)에 관한 자료는 영동정공(令同正公)께서 차자소윤공(次子少尹公)에게 급비(給婢)한 문건과 환(桓)에 대한 내용이며  또한 직장(直長) 소윤(小尹) 양공(兩公)의 지석(誌石)에 관한 내용입니다.

 


 

 

 

 

  1. 금구의록

 


金溝疑錄(금구의록)

諺傳桓墓所或金溝或淸州云而昔日後孫前林川郡守諱奎範之夢顯靈曰墓在金溝○純宗乙丑各派二十五人騎率偕徃尋得墓所於金溝豆亭里西南十五里許象頭山下書齋洞盖土人自告稱尹政丞墓遂買土置墓直田四畝窮搜墓標竟未得驗只立環標碑而歸于時二十三人先發二人姑在店舍忽有兩儒生<一老一少>過之曰海南諸尹己發矣其墓卽恒字墓二人聞此不詰此儒而歸家後偶發此說盖碑古石木邊之爲小傍無怪矣其後德井洞尹某賣食墓直田因被埋碑者之誘引遂理環標碑以滅後日之巧驗<金輿派所錄曰尹氏先墓之說人人同辭不可證其誰某之爲此言而若欲執證則招問其山下近村龍城里及兒織洞故輩則可辯矣>民漢李季孫買此洞而居此山下<書齋洞象頭山>夜夢有衆大官多率騶從自南而來坐於季孫家後墓下曰吾乃此墓神靈也子孫非不多而散在遠地此墓之失傳巳久汝旣在墓下若能守護則必有冥佑矣季孫夢覺後乃着實守護春秋香火自其後家産漸富人口稍繁季孫漸生濫心或使他人入葬墓上數多碑碣磨去文字斥賣他人者凡三矣更欲磨其餘碑則又夢神靈來즐曰汝不信吾言獲罪于神當有冥謫季孫不敢更賣欲泯其跡埋碑于屛處而家禍仍作自悔而來言于龍城里書齋訓長尹誨臣曰吾誤聽人誘引之言磨賣尹氏墓碑而致家禍季孫則因病致死其仲子昌允居泰仁山外面只金洞次子大得居全州二北面南城里云季孫動土埋碑時其次子大得詳見云故誘引招來使金光郁誘說曰適有願買碑之人而汝父買碑時有餘件所埋處云汝今指示則當掘而買之分其價矣大得수其術指示埋處掘而見之則碑是己磨而文字莫考故托言破傷不堪用而更問他埋處可用之碑則<此下關>

역문(譯文)

언전(諺傳)에 환(桓)의 묘소(墓所)가 금구(金溝) 혹은 청주(淸州)에 있다고하여 옛날 후손 전임천군수 규범(後孫 前林川郡守 奎範)의 꿈에 영혼이 나타나 나의 묘가 금구(金溝)에 있다고 현몽(顯夢)하기로 순종 을축년(純宗 乙丑年)에 각파에서 선발된 25인이 묘소를 찾고자 금구 두정리 서남 십오리(金溝 豆亭里 西南 十五里)쯤 있는 상두산하 서제동(象頭山下 書齊洞)에 이르니 토인(土人)들이 자고(自古)로 윤정승묘(尹政丞墓)라 한다고하여 드디어 묘직전 사무보(墓直田 四畝步)를 매치(買置)하고 묘표(墓標)를 찾기에 힘썼으나 확징을 얻지 못하고 환표비(環標碑)만을 세우고 돌아오다. 그때에 25인중 23인은 선발(先發)하고 2인은 아직 점사(店舍)에 유재(留在)하니 홀연히 두사람이 지나면서 해남윤씨들이 떠났다고하며 그 묘(墓)는 환자(桓字)의 묘(墓)라 하고 감을 2인이 듣기만하고 다시 묻지않고 돌아와 이말을 하니 대개 비석(碑石)이 오래됨에 석면(泐)이 마모되어 목변(木邊)이 심변(心邊)으로 된 것 같은 것이 괴(怪)하들 않느니라. 그후에 덕정동(德井洞)에 사는 윤모(尹某)가 묘직토(墓直土)를 팔아 없애고 환표비(環標碑)를 매몰(埋沒)하고 후일(後日)의 교험(巧驗)을 없애다. 이계손(李季孫)이란 사람이 이곳을 사서 산하(山下)에 거주할 새 꿈에 어떤 대관(大官)이 추종(趨從)을 이끌고 계손(季孫)의 집뒤 묘하(墓下)에 앉아 말하기를 "나는 이 묘(墓)의 신령이다. 자손들은 많지만은 원지에 살기 때문에 이 묘(墓)가 실전(失傳)된지 오래라네. 이미 묘하(墓下)에 살고 있으니 수호를 잘하면 명우(冥佑)가 있을 것이다. " 하다. 계손(季孫)이 꿈을 깬 뒤에 춘추로 향화(香火)올리고 착실히 수호를 하니 그때부터 가산이 점부(漸富)해지고 자손들이 번창해지다. 계손(季孫)이 남심(心)을 품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묘상(墓上)에 입장(入葬)을 시키고 많은 비갈(秘碣)의 문자를 마멸시키고 타인에게 매척(賣斥)하기를 세 번이나 하다. 또다시 불손한 마음을 품고 남은 비석(碑石)을 마멸코자함에 또다시 꿈에 현몽(顯夢)하기를 "네가 내말을 불신하고 내말을 어기니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라."함에 다시는 비석(碑石)을 팔지않고 사적(事蹟)을 없애기 위해 비석(碑石)을 매몰(埋沒)하니 가화(家禍)가 잇따라 일어나기로 스스로 뉘우치고 용성리 서재 훈장 윤회신(龍城里 書齋 訓丈 尹悔臣)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잘못으로 사람의 말을 듣고 윤씨의 묘비를 갈라 팔았기로 가화가 끝치지않다고 하였다고 한다. 기후 계손(其后 季孫)은 병사하고 그 중자 창윤(仲子 昌允)은 태인 산외면 지금동(泰仁 山外面 只金洞)에 살고 차자 대득(次子 大得)은 전주 이북면 남성리(全州 二北面 南城里)에 산다하니라. 계손(季孫)이 매비(埋碑)할 때 그의 차자(次子) 대득(大得)이 자세히 보았기로 유인을 해서 김광욱(金光郁)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달래기를 마침 비석(碑石)을 살사람이 있으니 네 부(父)가 비석을 팔 때 남은 비석(碑石)을 묻어두었다 하니 네가 가르쳐주면 비석(碑石)을 팔아 같이 나누어 갖자함에 대득(大得)이 곧이 듣고 매몰처를 가르쳐주어 발굴하니 비문이 이미 마멸되어 고증할 수가 없어서 말하기를 비석(碑石)이 파상(破傷)되어 쓸 수가 없다고하고 다른곳 쓸수 있는 비석(碑石)을 묻어둔 곳이 어디냐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