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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현정소단자

 

 사적 및 문헌

 


 

 

 

   우리 해남윤씨에 전해오는 사적 및 문헌을 살펴보면 6세조 환(桓)과 관련된 사적, 금구의록, 금구현정단자가 있으며, 중시조 영동정공에 관련된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들 자료들은 해남윤씨와 관련된 최초의 자료들로써 그 의의가 깊고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1. 환(桓)에 관한 자료는 우리 해남윤씨 윤환(尹桓)과 칠원윤씨의 윤환(尹桓)이 휘(諱)자가 같아서 혹시나 해남윤씨와 칠원윤씨가 근본(根本)이 같지않나 하였으나  여지승람과 칠원윤씨족보등을 살펴보건데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용이며, 또한 전북 김제 금구에 있다는 6대조 환(桓)의 묘소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2. 중시조 영동정공(令同正公)에 관한 자료는 영동정공(令同正公)께서 차자소윤공(次子少尹公)에게 급비(給婢)한 문건과 환(桓)에 대한 내용이며  또한 직장(直長) 소윤(小尹) 양공(兩公)의 지석(誌石)에 관한 내용입니다.

 


 

 

 

 

  1. 금구현정소단자

 


金溝顯呈訴單子(금구현정소단자)

恐鑑仰達于金溝官閤下伏以生等初非欲憑藉官威以濟生等之事也以私力莫可奈何故不得不有前後煩達是白齎大抵此事之知顚末莫過於洪達旭云者有口者同然○不喩洪也來言于生等曰若指以我指告之人則吾當直告其埋碑處云矣生等答以指告自非止一二人何可枚擧誰某云則洪也作色曰若咈吾心則雖脅之以官威而刃斬吾頸決不吐說云是遣頃者官問之下洪也姑爲緩罪之計以出而更入直告之意謾達其無意之言而颺言于生等曰吾非不知埋碑處而不可容易言說云是遣且曰寧受砲於海尹不可受砲於彼人云彼人云者果持誰某也洪也出又大言於街上曰如此事雖年久後言之其將殺我郁云則此指埋碑人而言者也其時此言兩店主同聞招問店主則可知其言之的實是遣洪也言內埋碑處乃是山下溝塹水田云故生等雇貰役丁鑿幾許丈終無所得則洪也仍更指山下磧石處故又掘則亦無所得是如乎蓋洪也專欲操弄漫漶必欲貽害於生等而後快於心者也且其恒言曰雖以官威之嚴置我於死地吾決不直告云如此至奸至毒之類不可尋常處之是白遣其他前狀中可證可詰之人都在官家之酌量明査是白齎支石派所綠曰金溝水流面象頭山下水慱山丙午龍庚兌搏換酉入首酉坐午得寅破大塚三又庚兌入首酉坐酉得丑破大塚四將軍石床石存矣他人塚許多洞名則書堂洞古名則竹林洞金山落脈地師到此地皆嘆美曰此地卽卿相大地便作無主空山豈不怪哉探問近處人言則皆曰海南尹氏墓也民漢李季孫居在墓下者數世矣自中年一野夢大官之行自南來威儀甚嚴入坐季孫家謂之曰吾則此墓神靈也子孫居在遠地曠省己久絶香火數百年無人守護矣汝在墓下故付託一言依言施行則必有冥佑夢覺後謹奉春秋享祭於墓數年家勢富饒其後俠他人入葬之後季孫忽爲乞之人始覺前夢符驗傳播人耳而其子聞渠父之言傳之曰碑是海南尹墓而洞稱海南尹墓洞有口皆言有耳皆聞碑石四件或云埋之竹田兒直洞居尹漢詳知云碑石一件季孫斥賣以是受禍故大懼三件埋之竹田丁寧

역문(譯文)

   금구현감(金溝縣監)에게 품(稟)하노니 생등(生等)이 관위(官威)를 빙자하여 우리의 일을 성취(成就)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력(私力)으로는 할 수가 없어 전후사(前後事)를 고(告)하노니 대저차사(大抵此事)의 전말(顚末)을 아는 자는 홍달욱(洪達旭)이란 자(者)라고 사람마다 말 만할 뿐이었다.
   홍(洪)이란 자(者)가 우리에게 와서 말하기를 "만일 날더러 이일을 안다는 사람을 가르쳐주면 내 마땅히 매비처(埋碑處)를 가르쳐준다."고 하기에 "한 두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요. 여러 사람이 말하더라."고 하니 홍(洪)이 발연작색(勃然作色)해 말하기를 "만일 내마음에 거슬리면 아무리 관(官)의 위력으로 내목을 친다고 하여도 결코 토설(吐說)을 않는다." 하다.
   관(官)에서 홍(洪)을 짐짓 완죄지계(緩罪之計)는 직고(直告)를 하기 위한 것인데 부질없이 횡설수설뿐 우리 보고 말하기를 "내가 매비처(埋碑處)를 아나 용이하게 말을 않는다." 하다. 시견(是遣)이란 자(者) 말하기를 "해윤(海尹)에게 원성을 드릴지언정 피인(彼人)에게는 원심을 살수 없다."고 하니 피인(彼人)이란 홍(洪)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한 가상(街上)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 이러한 일은 비록 년구(年久)한 후일지라도 언지(言之)면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한즉 차(此)는 매비(埋碑)한 사람을 가르쳐 말함이다. 이말을 점주(店主)들이 들었다하여 점주(店主)를 초문(招問)한즉 그말을 시견(是遣)이 하였던 것 적실(的實)하다.
   홍야언내(洪也言內)에 매비처(埋碑處)는 이 산하(山下) 구참수전(溝塹水田)에 있다하여 역정(役丁)을 고세(雇貰)하여 깊이 착굴(鑿掘)하였으나 없은즉 홍(洪)이란 자 다시 산하적석처(山下
磧石處)에 있다고하매 또 파본즉 또한 없었으니 이렇다 시함은 홍(洪)이란 자(者)가 오로지 조롱만환(操弄漫漶)해서 우리에게 해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항상 말하기를 아무리 관위(官威)로서 나를 사지(死地)에 둔다하여도 직고를 않는다하니 이렇타시 지간지독(至奸至毒)한 류(類)는 심상(尋常)히 다룰수 없으니 기타가증가결지인(其他可證可結之人)은 전상(前狀)에 있으니 도시관가(都是官家)의 명사(明査)를 바랄뿐이다.
   지석파기록(支石派記錄)에 의하면 금구 수류면 상두산하 수단산 병오 용맥(金溝 水流面 象頭山下 水慱山 丙午 龍脈)이 경태(庚兌)로 돌아 유방(酉方)으로 입수(入首)하여 유좌(酉坐)에 오득인파(午得寅破)로 대총삼분(大塚三墳)이 있고 또 경태로 입수하여 유좌에 유득축파(酉得丑破)의 대총(大塚)이 사분(四墳)이 있고 장군석상석(將軍石床石)이 있다고 하니라.
   타인의 무덤이 허다하니 차동명(此洞名)은 서당동(書堂洞)이요, 고명(古名)은 죽림동(竹林洞)이니 금산락맥(金山落脈)이라 지사(地師)가 차지(此地)에 와서 탄식하기를 차지(此地)는 경상대지(卿相大地)인데 부질없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으니 괴(怪)한 일이다하고 근처인(近處人)에게 탐문한즉 개왈해윤묘(皆曰海尹墓)라 하다.
   이계손(李季孫)이란 자(者)가 묘하(墓下)에 거주한지 수세(數世)가 되었는데 중년(中年)에 현몽하기를 대관(大官)의 일행이 남(南)으로부터 오는데 위의(威儀)가 심엄(甚嚴)하며 계손가(季孫家)에 와 앉자 말하기를 나는 차묘(此墓)의 신령(神靈)이다. 자손(子孫)들이 원지(遠地)에 살기로 광성(曠省)한지 오래되고 향화(香火)가 끊긴지 수백년이 되어 수호(守護)할 사람이 없은즉 네가 묘하에 살고 있는 고로 부탁하노니 내말과 같이 시행하면 후일에 명우(冥佑)가 있을 것이라함에 꿈을 깬뒤 춘추(春秋)로 묘제(墓祭)를 지낸지 수년에 가세가 부요(富饒)해지다.
   그후에 타인(他人)이 입장(入葬)한 후로는 계손(季孫)이 홀연히 개걸지인(
乞之人)이 되니 비로서 전자에 현몽함이 부험(符驗)한지를 알게되다. 이런말을 전파(傳播)하니 계손(季孫)의 자(子)가 그 부(父)의 말을 듣고 전해 가로되 비석(碑石)인즉 해윤(海尹)의 묘(墓)인데 동명(洞名)을 해남윤묘동(海南尹墓洞)이라 한다. 비석4건(碑石四件)인데 혹은 죽전(竹田)에 매치(埋置)하였다고하고 아직동(兒直洞)에 사는 윤모(尹某)가 상지(詳知)한다하며 1건은 계손(季孫)이 척매(斥賣)하여 일로서 화를 입어 대구(大懼)하고 3건은 죽전(竹田)에 매치(埋置)하였다하니 정녕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