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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정공고적

 

 사적 및 문헌

 


 

 

 

   우리 해남윤씨에 전해오는 사적 및 문헌을 살펴보면 6세조 환(桓)과 관련된 사적, 금구의록, 금구현정단자가 있으며, 중시조 영동정공에 관련된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들 자료들은 해남윤씨와 관련된 최초의 자료들로써 그 의의가 깊고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1. 환(桓)에 관한 자료는 우리 해남윤씨 윤환(尹桓)과 칠원윤씨의 윤환(尹桓)이 휘(諱)자가 같아서 혹시나 해남윤씨와 칠원윤씨가 근본(根本)이 같지않나 하였으나  여지승람과 칠원윤씨족보등을 살펴보건데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용이며, 또한 전북 김제 금구에 있다는 6대조 환(桓)의 묘소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2. 중시조 영동정공(令同正公)에 관한 자료는 영동정공(令同正公)께서 차자소윤공(次子少尹公)에게 급비(給婢)한 문건과 환(桓)에 대한 내용이며  또한 직장(直長) 소윤(小尹) 양공(兩公)의 지석(誌石)에 관한 내용입니다.

 


 

 

 

 

  1. 영동정공고적

 


令同正公古蹟(영동정공고적)

< 지정14년노비문서(至正十四年奴婢文書) : 보물 483호

   이 문서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3년(1354)에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尹光琠)이 소윤(小尹)의 관직을 가진 차자(次子)인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 주는 증서입니다.
  구성을 보면 소지(所志)6장, 입안(立案)2장 등 총 8장으로 된 문서이며, 「소지(所志)」6장에는 윤광전(尹光琠)이 노비를 상속하게된 사유를 상세히 적고 끝에 재주(財主)·정보(訂保)·필집(筆執) 곧 현노비(現奴婢)의 소유자 ·보증인(保證人)·대서인(代書人)의 성명과 수결(手決)을 붙여서 작성한 것입니다. 「입안(立案)」2장은 당시에 담당구역의 지방관인 탐진감무(耽津監務)가 이를 확인하여 상사(上司)의 결재를 신청하는 문서입니다.
   문장의 내용은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으며, 고대(古代)의 문서가 매우 희귀한 오늘날 이 문서는 송광사(松廣寺)의 노비첩(奴婢帖)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高麗)시대의 유일한 것이며, 고려시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오랜 연대를 내려오는 동안 좀이 먹어서 훼손된 것을 윤광전(尹光琠)의 12세손(世孫)인 윤덕희(尹德熙)가 영조(英祖) 20년(1755)에 다시 6장을 한 장첩(粧帖)으로 다시 꾸며서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表題)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습니다. 윤덕희(尹德熙)가 쓴 발문(跋文)에 「종중(宗中)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다시 첩으로 꾸며 놓았으니 후손들은 전가지보(傳家之寶)로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 문화재청 >

至正拾肆年甲午捌月拾壹日成文許與爲臥乎事叱段子丹鶴亦◎◎<意或奴字女落佑傍>子息參內唯一繼姓獨子是乎等乙用良妻父朴氏邊以傳來婢吾火以矣所◎◎◎◎<落數字:生婢大阿>只身乙奉祀條<蓋必外孫奉祀也>以許給爲去乎在亦後所生◎◎◎◎<落數字:以子孫>傳持鎭爲乎矣他余子息等亦爭望起云爲行◎◎◎◎<落數字:居乙等此>文字內事意◎◎◎<落數字:乙用良>內外官司辨別爲乎事是亦在<此文義蓋謂大阿只後所生奴婢待朴氏後孫成就使之傳授持保鎭壓而他時余子等輩說亦有爭望相起云爲行仰之弊則以此文字內辭意呈狀于內外官司使之辨別之意耶>
財主出父直長同正尹光琠  押
訂保  奉善大夫神虎衛保乘護軍尹
<落一字>
筆執  前伍尉 金
◎◎<落數字:承嗣>  押
<財主出云者指誰而云者耶其或朴氏喪敗只存幼兒及婢而漂泊出去不返故 同正公使次子少尹公姑爲次知養育其婢之故耶)>

學生尹丹鶴
右謹言所志矣段父直長同正尹光琠敎是
<落一字:>外祖父傳來婢大阿只矣<落一字>許與傳持爲白等臥乎粘爲<落數三字>考監踏印立案 成給向敎事望白內臥乎事是亦在謹言
監務官  處分
   至正十四年十月  日所志

訂筆等
右謹言所志矣徒段直長同正尹光琠亦字丹鶴亦中奴婢許與成文良中訂筆使內白好事是良
<落一字>以斜只立案 成給向敎事望白內臥乎事是亦在謹言
耽津監務  處分
   至正十四年十月 日狀
筆執 前伍尉金承嗣
訂保  奉善大夫神虎衛保乘護軍尹
<落一字>

十月十日付
<落一字>
耽津監務 行深  押

至正十四年十月十二日典議
右所志內乙用尹丹鶴奴婢許與粘連訂人筆執等各所志相考監務印立
案帖者亦中退者
監務  行深  押
 
◎◎◎<落數字>

역문(譯文)

   지정14년갑오 8월 10일에 성문(成文)하여 허여하는 일은 아들 단학(丹鶴)은 친생자식 셋중에서 유일하게 속사(續嗣)할 독자(獨子)이므로 처(妻)의 부친인 박씨(朴氏)로부터 전래한 노비 오불이(吾火伊)가 낳은 노비 큰아기(大阿只)의 몸을 봉사조(奉祀條)로 허여하는 것이니 후소생까지도 아울러 자손대대로 가지고 전할 것이로되 다른 자식들이 다툼을 일으키거든 이 문자 속의 사의(事意)로써 내외관사(內外官司)에서 변별(辨別)할 것이다.
   지정 14년 10월   일 장
   재주출부 직장동정 윤광전 수결
   정보  봉선대부신호위보승호군 윤
수결
   필집  전오위금승사  수결

학생 윤단학
   삼가 소지(所志)를 말씀드리는 것은 부친인 직장동정(直長同正) 윤광전(尹光琠)께서 저희 외조로부터 전래한 노비 큰아기(大阿只)의 몸을 허여하여 전해 가지라고 하셨으므로 첨부한 성문(成文)을 상고하여 감무께서 날인한 입안을 발급하여 주실 것을 바라옵기 삼가 바랍니다.
  감무관 처분
  지정14년 10월  일 소지

증인 집필 등
   삼가 소지(所志)를 말씀드리는 것은 저희들이 직장동정(直長同正) 윤광전(尹光琠)이 아들 단학(丹鶴)에게 노비를 허여하는 문서를 작성할 때 증인과 집필을 시킨 것이오니 하나하나 증명하여 입안을 발급하여 주실 것을 바라옵기 삼가 말씀드립니다.
   지정14년 10월 일장
   필집  전오위금승사  수결
   정보  봉선대부신호위보승호군 윤
수결

갑오 10월 10일부로 증명한다.
   탐진감무 행심 수결

지정14년 10월 12일 전의
   소지(所志)에 따라 윤단학(尹丹鶴)이 노비를 허여받은 사실에 대하여 함께 첨부 증인과 집필들의 각 소지(所志)를 고찰하여 감무가 날인한 신청인에게 발급하여 준다.
  감무 행심 수결

右令同正公給婢於次子少尹公文卷也而欲模其字體以寫生存時眞樣而若或登不相彷彿則反不知不模之爲兪故取其文辭謹此奉錄

  우(右)는 영동정공(令同正公)께서 차자(次子) 소윤공(少尹公)에게 급비(給婢)한 문건이니 그 자체를 모(模)하여 진상을 사생(寫生)코저하나 혹히 등재(登)를 함에 방불(彷彿)치 않으면 도리어 모(模)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함으로 그 문사(文辭)만을 취하고 이에 봉록(奉綠)하노라.


此我十二世 祖同正公授奴婢於十一世祖少尹公之文卷也淸主雍正癸卯後孫
得於古紙中褙而歲之德熙於壬申冬復還于南始得見之恐其久而紙毛墨改裝爲帖子以圖久傳而無傷噫攷其年紀元順帝至正十四年甲午則麗朝恭愍王三年也至今四百零二年之間不知歷幾兵閱幾滄桑而尙宛然無恙其亦奇疑此雖非先祖文翰筆蹟往事依然如在當時則後之云仍豈不把玩而寶重哉淸主札
乾隆乙亥十二世孫德熙拜首謹識


역문(譯文)

이는 십이세조 동정공(十二世祖 同正公)께서 차자(次子) 소윤공(少尹公)에게 급비하신 문권인 청나라 옹정계묘년(雍正癸卯年)에 후손 창(
)께서 고지중(古紙中)에서 득하여 표배(褙)를 해서 간직하고 있는 것을 덕희(德熙)께서 임신동(壬申冬)에 환향하야 비로서 득견(得見)하고 오래되면 지모흑유(紙毛墨渝)할 것을 염려하고 첩자(帖子)로 만들어 오래도록 보전할 것을 도모하다. 오라 그 년대를 헤아려보면 원나라 순제 지정십사년 갑오(順帝 至正十四年 甲午)인즉 려조 공민왕 삼년(麗朝 恭愍王 三年)이라. 지금으로부터 사백이년이란 세월동안 그 간에 몇 번이나 상창(桑)이 바뀌고 병희(兵)을 치렸건만은 손상없이 완연(宛然)함은 기특하다 할 것이니라 비록 선조의 문한필적(文翰筆蹟)이 않일지라도 왕사(往事)가 의연하여 당시와 같으니 자손들이 어찌 구슬같이 여기어 보중(寶重)치 않을 것이냐.
건륭 을해년 십이세손 덕희 배수 근지



我十七代 祖同正公之祖與考兩諱與漆相之父子兩諱同且 國史家乘之年代昭穆毫末不差而姓貫則不同彼此兩諱之外其先後代諸諱亦各不同故不敢但以兩世之姓名相同邊謂同祖而但金溝海尹墓 之諺傳曾或不無疑訝我 同正公之給婢於其子之年至正甲午者前三十一年於漆相之卒年洪無乙丑也以是觀之則甲午給婢之年漆相尙存矣人或近百享壽而亦不見子孫之夭折則六十歲前後之間幸見曾孫之分産者似或有之而此亦稀罕難必之事也且以若漆相勳祿之훤爀其生存未死之前所謂文卷若是貿貿然極無體樣必不然矣且居在耽津而爲名相則雖於革代之後麗末不甚久遠之事蹟豈漏於耽津邑誌又豈無本縣依萬一之諺傳乎今以麗史與遠祖文蹟交證參攷則從知吾祖與漆祖之彼此兩諱偶是同名而決非同人明矣未知金溝之諺傳海尹墓者其有何人明見其遺失碑之書海尹耶抑或土人以一道名族之故臆見而唱說耶不可萬一取信矣
七年丁巳正月       十七代孫 延 琦 編輯

역문(譯文)

십칠세 조동정공(祖同正公)의 조여고(祖與考)의 양휘(兩諱)가 칠원윤씨 상공부자양휘(漆源尹氏 相公父子兩諱)와 같고 국사(國史)와 가승년대(家乘年代)에 소목(昭穆)이 같으나 성관(姓貫)이 부동(不同)하며 양휘외에 기선후 제휘(其先後 諸諱)가 또한 같지 않으므로 다만 양휘만이 같다하여 동조(同祖)라고 할 수 없으며 단 금구(金溝)에 해윤묘(海尹墓)가 있다는 말은 전부터 내려온 언전(諺傳)이니 그런가하는 의아(矣訝)할바다. 동정공(同正公)께서 소윤공(少尹公)에게 급비(給婢)한 연대가 원지정갑오년(元至正甲午年)이니 칠상(漆相)이 졸(卒)한 홍무을축년(洪武乙丑年)보다 삼십일년 전이다.일로보면 갑오급비지년(甲午給婢之年)은 칠상(漆相)이 생존시인 사람이 혹 백세를 산다할 때 자손의 요절(夭折)이 없다고 본다면 육십세전후에 증손의 분산(分散)함도 볼 듯하나 이 또한 희한한 일이요 난필지사(難必之事)니라 또한 칠상(漆相)의 훈록(勳祿)이 그 생존시라면 문권이니 그렇듯이 무무(貿貿)하여 체양(體樣)이 극무(極無)하니 반드시 그렇지 않느니라. 또한 탐진(耽津)에 거주하면서 명상(名相)이 되었다면 비록 국조(國朝)가 바뀌었다 할지라도 려말은 구원한 일이 아니니 사적(事蹟)이 어찌 탐진읍지(耽津邑誌)에 빠졌으며 언전(諺傳)조차 없을 것인가 이제 려사(麗史)와 원조(遠祖)의 문적(文蹟)을 교증(交證)해보면 우리 선조(先祖)와 칠상(漆相)과의 양휘(兩諱)가 우연히도 같았지 결코 동인(同人)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니라. 아직 못거라. 금구(金溝)의 언전(諺傳)에 해윤묘(海尹墓)가 있다는 것을 그 귀가 과연 그 유실된 비(碑)에 해윤(海尹)이라고 쓴 것을 명백히 보는 자 있는가 혹 토인(土人)들이 일도(一道)의 명족(名族)이라해서 잘못보고 말한 것이냐 취신(取信)할 수 없느니라.
함풍칠년 정사 정월     십칠대손  延 琦(연 기) 編輯(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