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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온서직장영동정

 

 사적 및 문헌

 


 

 

 

   우리 해남윤씨에 전해오는 사적 및 문헌을 살펴보면 6세조 환(桓)과 관련된 사적, 금구의록, 금구현정단자가 있으며, 중시조 영동정공에 관련된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들 자료들은 해남윤씨와 관련된 최초의 자료들로써 그 의의가 깊고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1. 환(桓)에 관한 자료는 우리 해남윤씨 윤환(尹桓)과 칠원윤씨의 윤환(尹桓)이 휘(諱)자가 같아서 혹시나 해남윤씨와 칠원윤씨가 근본(根本)이 같지않나 하였으나  여지승람과 칠원윤씨족보등을 살펴보건데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용이며, 또한 전북 김제 금구에 있다는 6대조 환(桓)의 묘소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2. 중시조 영동정공(令同正公)에 관한 자료는 영동정공(令同正公)께서 차자소윤공(次子少尹公)에게 급비(給婢)한 문건과 환(桓)에 대한 내용이며  또한 직장(直長)
· 소윤(小尹) 양공(兩公)의 지석(誌石)에 관한 내용입니다.

 


 

 

 

 

  1. 고려 사온서직장영동정

 


고려 사온서직장영동정(高麗 司醞署直長令同正)<사적주(史蹟註)>

      공(公)은 시조(始祖) 휘(諱) 존부(存富)의 7대손(七代孫)이다.
      청(淸)나라 세조(世祖) 순치(順治)
<서기1644~서기1661>년간에 전부(田夫:농부)가 무덤의 계하(階下)를 바싹 파다가 무슨 돌이 삽에 따라 나왔는데 이는 곧 직장(直長) · 소윤(小尹) 양공(兩公)의 지석(誌石)이었다. 그러나 무지한 농부가 양처(兩處)에서 나온 지석(誌石)을 한곳으로 마구 흩어 던져 버리었다. 이로써 감히 위 아래로 위차(位次)를 정하지 못하던중 청(淸)나라 성조(聖祖) 강희(康熙)<서기1662~1722>년간에 여러 후손들이 의논을 내어 묘소 앞에 한 제각(祭閣)을 지어 동쪽 서쪽으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해마다 이 제각에서 한차례씩 제향(祭享)을 올리기 시작했으니, 이는 상황을 참작하고 임시로 변통하여 일에 대처하는 예(禮)에서 나온 것이다.

      공(公)의 장자(長子) 대호군공(大護軍公)의 묘소는 이미 상고할 수 없지만 직장(直長) · 소윤(小尹) 양공(兩公)의 향사(享事)는 이미 제각에 신위를 설치하여 행하고 있다. 삼부자공(三父子公)의 신위를 설치하여 합제(合祭)하는 것이 정(情)과 예(禮)를 펴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신년(戊申年) 가을부터 여러 종파(宗派)와 회의를 거쳐 구월십일(九月十日)에 제각에 삼위(三位)의 제상(祭床)을 차례로 설치하여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청
(淸)나라 함풍(咸豊)<서기1851~1861>8년무오(八年戊午)<서기1856년>즉 우리 조선 철종9년(哲宗九年) 춘2월(春二月)에 비(碑)를 세웠는데 서기1961년 9월에 개수(改竪)하였다.

      세적(世跡)을 살펴보니, 원(元)나라 지정(至正)
<서기1341~1367>14년(十四年) 갑오(甲午)<서기1354년>에 공(公)의 제이자 소윤공(第二子 少尹公)께서 친히 서명하여준 문기(文記)가 있었으니, 곧 고려조(高麗朝) 공민왕(恭愍王) 삼년이었다.

      조선 경종(景宗) 삼년 계묘(癸卯)
<서기1723년>에 후손이 고지(古紙) 가운데 취득하여 그 문기(文記)를 겹쳐 부쳐서 간직하였는데 영조(英祖) 삼십일년 을해(乙亥)<서기1755년>에 후손 덕희(德熙)가 그를 좋게 장식하여 둠으로서 그 문기(文記)가 오래토록 전하게 되었다.

      기사보(己巳譜)를 살펴 보건데, 후손 선오(善五)가 지석(誌石)을 취득하였다. 운운(云云)하였다. 그러나 묘비(墓碑) 음기(陰記)에는 또한 전부(田夫)가 바싹팠다 이르니, 연대가 합당치 않다. 때문에 비(碑)의 음기(陰記)에 쫒아 기록하여 후일(後日)의 고증(考證)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