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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과 충신

 

 가문을 빛낸 인물(공신과 충신)

 

 

 

 

 

   우리 해남윤씨 가문을 빛낸 인물 중에서 공신록(功臣錄)에 책록되신 공신 9분과 화암사에 배향되신 충신 7분과 열부 장흥위씨 그리고 그외에도 고증이 명확하지 못하여 기록에 남기지 못한 많은 선조님들이 계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제라도 우리네 선조님들의 유물유적을 더욱 소중히 발굴관리보존하여야 할 것입니다.

 

 

 

 

 

  1. 해남윤씨 종중 충신일람(임진,정유,병자란)

 

 

 

 

 

 

 

 

8 광전

9 단봉

 

 

 

 

 

 

9 단학

10 사보

11 종

12 (가,나 )

 

 

 

 

10 사서

11 경

12 (다,라,마)

 

 

 

 

 

 

 

 

 

 가

 

 

 

 

 

 

12 신우

13 충언

14 의국

15 (環)

 

 

宣武原從功臣

 

 

 

15 (璋)

 

 

宣武原從功臣

 

 

 

15 당

16 준강(準綱)

 

宣武原從功臣

 

 

 

15 (琦)

 

 

宣武原從功臣

 

 

 

 

 

 

 

 나

 

 

 

 

 

 

12 신우

13 충상

14 속

15 천을

16 (沃)

 

扈聖宣武功臣

 

 

14 기

15 천복

16 연

17 흥신(興信)

扈聖宣武功臣

 

 

 

 

 

 

 

 다

 

 

 

 

 

 

12 신인

13 순

14 경우

15 강

16 치경(致敬)

 ★

 

 

 

 

15 약

 

 

 

 

 

 

15 (綸)★

16 동철(東喆)

 ★

 

 

 

 

15 (紳)★

 

 

 

 

 

 

 

 

 

 

 라

 

 

 

 

 

 

12 효의

13 형

14 용

15 이경(履慶)

 ★

 

 

 

 

 

15 익경(益慶)

16 동로(東老)

 ★★

 

 

 

 

 

 

 

 

 마

 

 

 

 

 

 

12 효정

13 구

14 홍중

15 (俔)

 

 

宣武原從2等

 

 

 

15 (儉)

 

 

宣武原從功臣

 

 

 

 

 

 

 

 바

 

 

 

 

 

 

12 맹손

13 학

14 평기

15 (璉)

 

 

宣武原從勳

 

 

 

15 원

16 인홍(仁弘)

 

宣武原從勳

 

 

 

15 (琇)

 

 

宣武原從勳

 

 

 

15 기

 

 

 

 

 

 

 

 

 

 

-. 선무원종공신 [宣武原從功臣]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號).
-. 호성원종공신 [扈聖原從功臣] :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號).

* 1. ★       표 : 7위 화암사에 배향
   2. 참고문헌 :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 호성원종공신록(扈聖原從功臣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충의사록(忠義士錄), 화암사지(花巖祠誌), 해남군지(海南郡誌), 강진군지(康津郡誌),영암군지(靈巖郡誌)

 

  2. 화암사와 칠충신

 

1. 화암사(花巖祠)

   화암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한 부장공(部將公) 윤 륜(尹 綸), 주부공(主簿公) 윤 신(尹 紳), 봉사공(奉事公) 윤치경(尹致敬), 양근군수(楊根郡守) 윤이경(尹履慶), 판관공(判官公) 윤익경(尹益慶), 호산공(壺山公)  윤동철(尹東喆)과 도사공(都事公) 윤동로(尹東老) 등 해남윤씨일문(海南尹氏一門)의 칠충(七忠)을 배향(配享)한 사우(祠宇)로서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 화방마을에 소재한다.
신미(1811)년과 임오(1822)년 위 윤 륜(尹 綸), 윤동로(尹東老)를 제외한 5위의 충의정신(忠義精神)을 기리기 위하여 향유(鄕儒)와 후손들이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으며 계미(순종23,1823)년에는 김영서(金泳서), 최석훈(崔錫勳) 등 도내 유림들이 통문(通文)을 각지에 내고 원우(院宇) 건립을 청하였다.
   이에 태학(太學)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다 순절(殉節)한 분들의 사우(祠宇)가  없음을 조정(朝廷)의 미흡함으로 알고 그해(1823,계미) 군동면 화암(花巖) 아래 사우(祠宇)를 창건(創建)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는 위 5위(五位)를 배향(配享)함으로 5충사(五忠祠)라 하였다.
그 후 무진(고종5,1868)년 서원 훼철령(毁撤令)에 따라 훼철후 복설(復設)치 못하고 신사(1941)년에는 화암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해남윤씨 5충비(海南尹氏 5忠碑)'만을 세웠다. 여러차례에 걸쳐 복설(復設)을 위한 통문을 내었으나 을묘(1975)년에야 윤치구(尹致球), 윤홍석(尹篊錫)을 비롯한 후손들과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복설(復設)하였다.
   경신(1980)년 도유사(道儒祠)로 되었고 정묘(1987)년에는 1597년(정유재란)때 5충과 함께 순절하였으나 배향되지 못한 윤륜(尹綸)을 추배(追配)하여 주벽(主壁)으로 하였고 윤동로(尹東老) 또한 추배(追配)하여 모두 7위를 배향하고 있다.
   따라서 해남윤씨일문의 7충을 배향하므로 '칠충사(七忠祠)'라고도 한다.
 

 

2. 성산하 대교야 전황 개요

   1592(임진,선조25)년 군자감(軍資監) 주부공(主簿公) 윤신(尹紳)은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던중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곧바로 상경하여 임금을 섬기려 하였으나 이미 영호남 지역이 왜적의 손에 들어가 남쪽의 진로가 차단되었고 경사(서울)는 함락되어 왕가(王篤)가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할 수 없이 '여기 남해안에서 준동하는 적과 싸워 일사보국하는 것도 신하의 도리다.'고 고향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장질 치경(致敬),장남 동철(東喆)과 합모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가동을 합쳐 지금의 도암면 지석리 동령마을 뒷산(속칭 깃대봉) 정상에 포진하여 군량을 준비하고 군기를 만들며 3,000여평 분지형 광장을 만들어 훈련하는 등, 요새화<지금도 장단(將壇:장군이 올라 군을 지휘하는 단)과 현기퇴(賢旗堆 : 군기를 꽂는 흙더미), 취사용 가마솥자리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으며 이 곳을 성산(또는 병치)라 한다.>하고 적의 출몰 길목에서 싸움을 걸고 치고 빠지는 기정병법(奇正兵法) 전략으로 수시로 출몰하는 적을 격퇴시켜 평온을 되찾았다.
1597년(정묘 성종30년) 임진년에 의주로 파천(播遷)하였다가 계사(1593)년 10월 환궁하실 때까지 대가(大篤)를 호종(扈從)하였던 부장공(部將公) 윤륜(尹綸)이 사가(賜暇)를 받아 일시 귀향하였고 호산공(壺山公) 윤동철(尹東喆)이 장흥위씨(長興魏氏)와 결혼하였다.
마침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남해안 일대의 민생은 비참 그것이었다. 상경하여 호성(扈聖)의 기회를 잃어 버린 윤륜(尹綸)은 동생 신(紳), 조카 치경(致敬), 동철(東喆)과 합세 의기투합함으로서 의병을 증모하고 군량과 군기를 보완하며 기습과 정면공격으로 적의 예기를 꺽었다.
그러나 정유(선조 30, 1597)년 10월 10일 결전의 날 8월 16일 남원성을 침탈하고, 8월 17일 황산성(충남 연산)에서 승리한 왜육군이 전라도 전역을 침공하였고 9월 16일 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에서 대패한 왜군과 송지 달마산 전투에서 패한 왜군, 영암에서 남하한 왜군 등이 합세한 대군과 맞붙게 된다. 옥천면  성산하 대교야(한다리 들)의 대회전! 포탄의 연기와 비오듯한 탄알을 피하면서도 큰 전과를 올려 나아갔으나 전세불리 달마산 전투에서 승리한 윤현, 윤검 형제의 의병과 성남에서 김인수장군과 김연옥형제와 그 종제의 의병이 대거출동 지원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윤(綸), 신(紳), 치경(致敬), 동철(東喆) 모두 장열하게 순절하였으니 오호라. 이 얼마나 비통한가. 교각에 묶이어 살을 깍아 절명에 이르면서도 주부공 신은 적삼 한 폭을 찢어 "공왜신명 무보성조(허망하게 목숨을 버리어 성군의 조정에 보답치 못한다는 뜻)" 피로써 글을 쓰고 적을 꾸짖는 소리 산천을 메아리쳤으니 장하도다. 그 높은 충절이여!
다리 밑 숲 속에서 공의 운명을 지켜본 여종 운선(雲仙)은 적이 물러난 뒤 그 피묻은 적삼을 가지고 공의 자부 장흥위씨(윤동철의 配)에게 고하니 성혼한 지 얼마되지 않은 부인은 억장이 무너졌고 통분에 사무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단0(斷0)의 한을 참고 견디며 칠흙같은 야반에 전장에 달려가니 시체는 산처럼 쌓여있고 성혈은 냇물처럼 고여 있었다.
촛불을 밝혀들고 부군 동철(東喆) 과 시부 신(紳), 시중부 윤(綸), 시종숙 치경(致敬)의 시체를 찾아 그 머리만을 취하여 치마폭에 쌓아 귀가하고 다시 안장하였으니 이 얼마나 장하고 충의첨지(忠義瞻智)한 일인가!

3. 화암사 봉사 칠충의 사적

부장공(部將公)        휘 윤   륜(尹   綸:1548~1597) 자. 사언(士言)
주부공(主簿公)        휘 윤   신(尹   紳:1552~1597) 자. 사진(士搢)
봉사공(奉事公)        휘 윤치경(尹致敬:15 ?~1597) 자. 일지(一之)
양근군수(楊根郡守)  공 윤이경(尹履慶:15 ?~1597) 자. 사영(士榮)
판관공(判官公)        공 윤익경(尹益慶:1554~1597) 자. 탁영(卓榮)
호산공(壺山公)        공 윤동철(尹東喆:15 ?~1597) 자. 길로(吉老)
도사공(都事公)        공 윤동노(尹東老:15 ?~   ?  ) 자. 군수(君수)

가. 세계(世系)

(1) 윤륜(尹綸), 윤신(尹紳)은 파조(派祖) 적순공(迪順公) 휘 효인(孝仁)의 증손으로 부 습독공(習讀公) 휘 경우(景佑)와 모 나주나씨(羅州羅氏) 사이에서 태어난 3남과 4남으로 형제간이다.

(2) 윤치경(尹致敬), 윤동철(尹東喆)은 습독공(習讀公) 휘 경우(景佑) 의 장손(長孫)과 방손(房孫)으로 치경(致敬)은 부 참봉공(參奉公) 강(綱)과 모 광산이씨(光山李氏)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동철(東喆)은 부 주부공(主簿公) 신(紳)과 모 해주오씨(海州吳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중부(仲父)인 도사공(都事公) 약(約)과 영광김씨(靈光金氏) 사이로 양자하였다.

(3) 윤이경(尹履慶), 윤익경(尹益慶)은 파조(派祖) 진사공(進士公) 휘 효의(孝義)의 현손(玄孫)으로 부 초계군수공(草溪郡守公) 용(容)과 모 영광김(靈光金氏)씨 사이에서 태어난 2남과 3남으로 형제간이며 윤동로(尹東老)는 부 윤익경(尹益慶)과 모 장흥임씨(長興任氏)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나. 사적(事蹟)

(1) 윤륜(尹綸) : 무예에 비범하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만호(萬戶)와 부장(部將)벼슬을 역임하였다.

(2) 윤신(尹紳) : 행의(行義)가 독실(篤實)하고 문장의 본질이 밝고 뚜렸하며 첨략(瞻略)이 과인(過人)하였다. 관직은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냈으나 선조 25년에 사직하였다.

(3) 윤치경(尹致敬) : 천자엄정(天姿嚴正)하고 강개대절(慷慨大節)이 있어 향공천(鄕貢薦)으로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가 되었으나 미구에 사직하고 학문에 힘쓰고 병서는 물론 기마술까지 연마하였다.

(4) 윤동철(尹東喆) : 문장절행(文章節行)이 출중하고 병법에 능하여 기사(騎射:말타고 활쏘기)에도 특출하였다.

위 4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윤신을 중심으로 윤치경, 윤동철이 합모창의하여 왜적과 대적하였으며 특히 정유재란에는 귀향한 윤륜과 합세 성산하 대교야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도 중과부적 장열하게 순절하므로서 멸사보국 충성을 다하였다.


*. 열부(烈婦) 장흥위씨(長興魏氏)

    부인은 주부공 휘 윤신(尹紳)의 자부요, 호산공 휘 동철(東喆)의 배이시다.
    성관은 장흥위씨(長興魏氏)로 고(考) 부호군공(副濩軍公) 위덕관(魏德寬), 조(祖) 진사공(進士公) 위곤(魏鯤), 증조(曾祖) 참봉공(參奉公) 위진현(魏晋賢)이니 충열공(忠烈公) 위계연(魏繼延)의 후손이다. 시례가문(詩禮家門)에서 성장하여 정숙지덕과 겸양지덕을 갖춘 규수로 정유(1597)년에 윤동철(尹東喆)과 혼인하고 얼마되지 않아 성산하 대교야 전장에서 순절한 부군과 시부, 시중부, 시종숙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시킨 충의첨지(忠義瞻智)한 여걸(女傑)이요 열부(烈婦)이시다.


(5) 윤이경(尹履慶) : 기국이 초범하고 강개기절이 있었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1592)년에 양근군수(楊根郡守)가 되었다. 정유(선조 30년, 1597)년 정유재란에 왜적이 재침하여 대거 북진해 오므로 양근의 작은 성은 풍전등화였다. 공은 죽기를 맹세하고 부하들에게 '양근군(楊根郡)은 비록 소성(小城)이나 도성인후(都城咽喉)의 요충이니 여기서 적을 막아야 진군속도가 늦어지고 도성이 안전할 것인즉 우리는 이 성을 벼개삼아 일사보국(一死報國)하여야 한다. 설사 성공을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신하의 직분이 아니겠는가?'라고 충의로 격려하니 군병들이 감격 사기충천하였다. 성을 빈틈없이 지키면서 때로는 야음을 틈타 성 밖으로 기습공격 적을 격퇴하면서 4개여월이나 버티었으나 적병은 성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하고 총공격을 해오니 외원군도 기대할 수 없는 일편고성 식량과 군기가 바닥나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공은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을 무수히 죽였으나 만신의 상처를 입고 목숨이 끊길 때까지 적을 꾸짖다가 순절하였다.

(6) 윤익경(尹益慶) : 학문이 탁월하고 지략이 과인하며 강개심이 강해 그 재기가 백씨 양근군수공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임진왜란에는 창의장판관(倡義將判官)이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세가 다시 치열해짐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격문을 날려 충의지사를 모집하고 가동을 합쳐 일족(一族:약 500명이 일족)군을 편성 북향(경도) 진군하니 왕성에 가서 임금을 호위할 목적이었다. 진군도중 출몰하는 적군을 격멸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뜻밖의 대군을 만나 한밭(지금의 대전부근) 격전 끝에 장렬히 순절하였다.

(7) 윤동로(尹東老 당림처사:棠林處士) : 재능과 도량이 범인과 다를뿐아니라 강개와 기절이 세상에 알려진 선비이다. 병자(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뜻을 같이한 의병을 모집하여 천리길 머나먼곳 임금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군하였으나 산이 막히고 강을 넘지 못해 결국 임금님께 갈 수 없어 섬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귀향했다. 당림(棠林:지금의 작천면 상당리)에 살면서 북 호와의 화의 소식을 듣고 '멸왜척화(滅倭斥和:왜국을 토벌하고 호를 배척한다는 뜻)' '불망군부(不忘君父: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를 죽을 때까지 좌우명으로 은거하였다. 후에 조정에서는 도사문학(都事文學)을 사(賜)하였다.

 

 

  3. 공신녹권을 받은 충신

 

1. 임진왜란에 1실2세(1室2世)의 4충신

     파조 호군공 휘 종(種)의 현손으로 목사공 휘 충언(
忠彦)의 차방계인 정언공 휘 의국(義國)의 차남 휘 환(環), 제5자 휘 장(璋), 제7자 휘 기(琦), 제6자 당의 장자 휘 준강(準綱) (해남윤씨 종중 충신일람 가항 참조)
     위 4충은 1실에서 생장한 혼계 숙질간으로 임진왜란에 즈음하여 왜적과 싸우다 혹은 전사 혹은 대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권을 받은 충신이다.

(1) 윤환(尹環) : 성적강중하고 기사와 병법에 능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을 거쳐 판관에 올랐다. 임진왜란에 적병이 침경함에 적병을 맞아 기계로 여러번 공을 세우고 장열히 전사하였다.

(2) 윤장(尹璋) : 효우지성하고 문예탁월하며 차형 판관공 환에게서 무예와 병서를 익혔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를 거쳐 참군에 올랐다. 임진왜란에는 박란과 더불어 작전계획을 세우고 도처에서 적을 무칠렀으나 장열히 전사하였다.

(3) 윤기(尹琦) : 무과에 급제 검정을 거쳐 목포만호와 당진현감을 겸령하였다.  임진왜란에는 통제사 이경원을 따라 그 작전참모로 좌우가 모두 기정을 겸한 전술에 감탄하였다. 어느 날 무수한 적선이 바다에 꽉차게 침범해오니 모두 무서워 떨며 전의를 상실함에 신여량 송안연 검사 송덕일 등 27인이 공을 따라 죽기로 협력하여 사졸보다 앞장서 적병을 무찔러 대첩을 거두었다.

(4) 윤준강(尹準綱 1577~1637) : 자 청연. 호 만휴.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고만하며 문무양예에 비범하여 임진(1592)년 16세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대거침범한 왜적은 육로로는 경성을 향하여 직상하여 왕성과 평양 함경도를 유린하고 서남해안을 침범한 적 해군은 해남을 자주 침경하였다. 공은 해남의군을 거느리고 달마산에 진을 치고 적을 유인하여 대파하였다.

    윤환(尹環)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윤장(尹璋)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윤기(尹琦)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윤준강(尹準綱)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 임진란 호성 선무공신

     파조 호군공 휘 종의 5대손으로 장사랑공 휘 충상의 증손 휘 윤 옥(尹沃)과 동 휘 연의 차자 휘 윤흥신(尹興信)(해남윤씨 종중 충신일람 나항 참조)     

(1) 윤옥(尹沃)       : 자 계숙. 호 일제.
(2) 윤흥신(尹興信) : 자 이경. 호 석헌.
  효도와 우애 기우엄정하고 학문이 탁월하며 특히 기사에 능할 뿐 아니라 임기응변하는 용병술에 정통하여 장재의 칭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대거 침입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종질 윤흥신(尹興信)과 함께 의군을 모집하여 왕성으로 진군하였다. 전세 불리하여 의주로 파천하시는 대가를 호종하는 도중 여러번 적군을 격파 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환궁하신 후에는 의군을 이끌고 귀향하는 도중 영암 가마골 밤재(영암, 강진, 해남 경계)에 이르러 남해안에 상륙하여 영암을 침범하려는 적군을 만나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적군을 대파하고 패주하는 적병을 무수히 점멸하니 조정에서 그 공을 대찬하여 근위 장군을 제수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들은 해남군병을 모아 행치에서 훈련시켜 이를 인솔하고 패주하는 왜군을 쫒아 거제도로 진군하고 수사 이억기와 함께 그곳 해안을 거점삼아 출몰하는 적병들과 충돌하였으나 전세불리 장열히 순절하였다.

     윤   옥(尹沃)    : 호성선무공신(扈聖宣武功臣). 통정대부금위종사관(通政大夫禁衛從事官)
     윤흥신(尹興信) : 호성선무공신(扈聖宣武功臣). 통정대부 중추부 첨지(通政大夫 中樞府 僉知)를 증하였다.
     *. 참고문헌 선무읍성양원종공신록, 호남절의록, 영암군지 참조.

3. 임진왜란 형제 충신

     파조 어초은공 휘 효정
(孝貞)의 증손으로 귤정공 휘 구(衢)의 제3방손이요, 참판공 휘 홍중(弘中)의 3자 휘 현(俔)과 동 4자 휘 검(儉)(해남윤씨 종중 충신일람 마항 참조)

(1) 윤현(尹俔) : 자 대유. 을유(선조 18,1585)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윤검(尹儉)과 창의하여 적군 격멸에 힘써오던 바 정유재란에는 남해안으로부터 상륙 침범해온 적군을 해남 송지 달마산에서 만나 격퇴하면서 정유 10월 10일 성산하 대교야 병치에 이르러서는 적군의 포위 속에 빠져 전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마침 길의 왼쪽 돌 틈에서 구렁이 두 마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형제가 각각 한 마리씩 잡아들고 황겹결에 휘두르다보니  향한 곳마다 적의 머리가 뚝뚝 베어 땅에 떨어진다. 이상하게 여겨 손에 쥔 것을 다시보니 이건 구렁이가 아니라 고전의 명검이었다. 수백의 적을 죽이고 머리와 귀를 잘라 검보와 함께 조정에 올렸다. 그 후 다시 장흥 석대하 전투에 참전하여 적에게 포위 당했으나 가가스로 포위망을 뚫고 적의 말 3마리를 탈취 아우 검(儉)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정유 12월 16일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하였으며 어묵으로 시구를 내려 그 미덕을 포상하였다. '하얀 뱀 명검으로 화하여 원수를 쳐부시고 첩보를 올렸다. 세 번이나 왜적군마를 탈취하고 일곱 번 군중을 뛰어 넘었다.'

(2) 윤검(尹儉) : 자 이소.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와 군기사 참봉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현(俔)과 함께 창의하여 싸웠으니 달마산 성산하 대교야 장흥 석대 전투 등 형 현과 함께 동참하고 석대전장에서 순절한 형 현(俔)의 시신을 수습하여 귀향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하였으며 계축(광해 5, 1613)년에는 승행임뢰도 진영에 올랐고 이어서 목포 수군만호와 통천대부 흥양현감을 지냈다.

     윤현(尹俔) : 선무원종 2등공신. 가선대부 병조참판 증
     윤검(尹儉) : 선무원종공신
     *. 참고문헌 선무호성양원종공신록, 호남절의록, 해남군지 참조.

4. 임진왜란 1실2세(1室2世) 3충신

     파조 충남파 참의공 휘 사서
(思瑞)의 증손이신 군자감직장공 휘 호의 자 휘 평기의 장남 휘 연, 3남 휘 수와 차남 휘 원의 자 휘 인홍(해남윤씨 종중 충신일람 바항 참조)

(1) 윤연(尹璉) : 자 원경. 호 가암. 효우초범하고 힘이 셌으며 1558년 명종 1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 대가파천때는 호위장으로 제 수(琇), 질 인홍(仁弘)과 함께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나 내간상(어머니 또는 할머니상)을 당함에 장자이므로 왕의 은명을 받고 귀가하여 상사를 치른 후는 의병장 변사진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 막하로 향하다가 중도에서 우수사 이억기군과 합세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나 교전 중 순절하니 이수사와 충무공도 통탄을 금치 못하였다.

(2) 윤수(尹琇) : 자 원여. 힘이 뛰어나고 남달라 1587 선조 20년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에 이르렀다. 임진란때 형 연(璉)과 질 인홍(仁弘)과 함께 대가파천에 호종하였으며 특히 대가환궁시에 큰 공을 세웠다.

(3)윤인홍(尹仁弘) : 자 인숙. 효우가 지극하고 무예가 남달라 1590 선조23년 무과에 급제하고 참상 수문장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시종신으로 백부 연(璉) 숙부 수(琇)와 함께 대가파천에 호종하여 지대한 공을 세움으로 근로훈을 받아 통천대부 보감종사관에 올랐다.

     윤   연(尹璉)    :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윤   수(尹琇)    :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윤인홍(尹仁弘) :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여기에 기술하지 못한 충신 또한 여러분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고증이 명확하지 못하여 기록하지 못하였읍을 해량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