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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諫院正言翁山尹公墓誌銘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옹산(翁山) 윤공(尹公)의 묘지명

공은 휘는 서유(書有), 자는 개보(皆甫)이다. 해남 윤씨(海南尹氏)인데 중세에 강진(康津)에 옮겨 살았다. 윤씨의 자취는 어초은자(漁樵隱者) 효정(孝貞)에게서부터 비로소 나타났고 그 아들 귤정(橘亭) 구(衢)가 호당학사(湖堂學士)가 되었고 효정(孝貞)의 형 효례(孝禮)도 또한 행의(行誼)가 있었으니, 공의 조부이다. 그 뒤에 면면히 이어져 혹 음직(蔭職)으로 벼슬하기도 하였다.

증조부의 휘는 홍좌(弘佐), 조부의 휘는 극효(克孝)이니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휘는 광택(光宅)이니 또한 포의(布衣)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사람됨이 침지(沈鷙 침착하고 굳셈)하고 호매(豪邁)하여 자산을 천만금이나 모았는데, 베풀기를 좋아하고 남의 급함을 구제하였으며 빈객을 좋아하고 의기를 숭상하였다.

우리 선인이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있을 적에 백련동(白蓮洞)으로 놀러 갔었는데 길이 강진을 경유하게 되었다. 목리(牧里)의 별장으로 공을 방문하여 즐겁게 환담하며 밤을 지새우고 시를 남겨 작별하였으니, 이는 건륭 무술년(1778, 정조 2) 연간의 일이다.

또 재산을 나누어 아우들에게 주고, 여러 자질들을 채찍질하여 학문에 힘써 문장을 이루게 하고, 제례(祭禮)를 정하고 제기(祭器)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아내를 맞을 때 면포(綿布)를 예단(禮單)으로 하는 것을 가법으로 삼았다. 출납에 인색하지 않으니 거지들은 해룡공(海龍公)이라 불렀다. 이분은 대개 윤씨의 중조(中祖)이다. 건륭 갑신년(1764, 영조 40) 11월 28일에 공을 목리에서 낳았다.

공이 취학(就學)하자 산 동쪽 심곡(深谷) 안에 서당을 별도로 설치하고 진사 윤은서(尹殷緖)를 맞아 스승으로 삼으니, 윤은서는 본디 학문을 널리 닦고 교회(敎誨)를 잘하였다. 관례(冠禮)를 한 뒤에 진산(珍山)에 보내어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게 하였으니, 곧 나의 외가이다. 서책과 필묵(筆墨) 이외에는 전화(錢貨)를 주지 않아, 공으로 하여금 춥고 배고픔으로써 근골(筋骨)을 괴롭게 하고 거친 밥을 먹음으로써 비위(脾胃)를 맑게 하도록 하였으니, 의방(義方)으로 자식을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공은 부요한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능히 검약(儉約)을 숭상하고 분화(紛華)를 싫어하며, 행실을 돈독히 하고 말을 삼가며 문식(文識)이 넓고 넉넉하여 속유(俗儒)로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경술년(1790, 정조 14) 사이에 공이 북으로 서울에 노닐면서 이공 가환(李公家煥)을 소릉(少陵)에서 뵈옵고, 또 우리 형제와 교분을 정하였다. 12년 뒤 신유년(1801, 순조 1) 겨울에 내가 장기(長鬐)에서 다시 강진(康津)으로 유배갔다. 이때를 당하여 무릇 나와 소릉(少陵 이가환을 말함)과 좋게 지낸 사람은 모두 죄망(罪網)에 걸렸었다. 공도 도강(道康 강진의 옛 지명)에서 옥에 불려들어갔다가 증거가 없어 나온 지 겨우 두어 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감히 서로 방문하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 임술년(1802, 순조 2) 겨울에 공이 부친의 명으로 종제 시유(詩有)를 몰래 읍에 들여보내어 서로 만나보고 술과 고기를 보내어 위로하기를,

“백부(伯父 윤서유(尹書有)의 아버지요 윤시유(尹詩有)의 백부임)가 옛날의 일을 생각하여 말하기를 ‘친구의 아들이 궁곤하게 되어 우리 고을에 의탁하였는데, 내가 비록 관곡(館穀)을 제공하지는 못하더라도 두려워하고 삼간다는 한 가지 이유로 마참내 문유(問遺 안부를 묻고 물건을 선사함)조차 철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혹 밤에 와서 예부터 좋게 지내던 정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때마침 교리 김이재(金履載)가 고이도(皐夷島)에 귀양살이하였는데 나를 통하여 공의 형제를 알고 세망(世網)이 너무 촘촘함을 성대히 말하니 이속(吏屬)들이 모두 깨닫고 드디어 왕래를 막지 않았다.

내가 다산(茶山)으로 옮겨 살게 되어서는 더욱 공의 집과 가까워져 10리도 못 되었다. 공이 아들 창모(昌謨)를 보내어 나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게 하고, 드디어 혼인 맺기를 의논하고 이사하기를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가경(嘉慶 청 인정의 연호) 임신년(1812, 순조 12)에 창모가 우리집에 장가를 들고, 그 이듬해
계유년(1813, 순조 13)에 공의 온 집안이 북으로 건너가서 처음에는 귀어촌(歸魚村)에 살다가 지금은 또 이웃에 산다. 이것이 두 집이 서로 관계가 친밀해진 본말이다.

공은 경의(經義)로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북방에 산 지 4년 만인 병자년(1816, 순조 16) 가을에 정시(廷試) 병과(丙科) 제13인으로 합격하였으며, 그 이듬해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 공의 나이 54세여서 법으로는 6품에 승진되어야 하나 당인(黨人) 중에 방해하는 자가 있어서 전조(銓曹 이조)에서 그대로 보류하였다. 무인년(1818, 순조 18) 여름에 심공 상규(沈公象奎)가 이조 판서가 되어 곧바로 주의(注擬)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임용되고, 가을에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기묘년(1819, 순조 19) 여름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옮겨지고 늦겨울에 예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경진년(1820, 순조 20) 가을에 조사(詔使)를 맞이하기 위해 도감(都監)으로 나아갔다.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신사년(1821, 순조 21) 봄에 효의왕후(孝懿王后 정조의 비(妃) 김씨(金氏))가 승하하자 공이 또 빈전도감 낭청(殯殿都監郞廳)에 차정(差定)되어 공로가 있었다. 6월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는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하고 소패(召牌)가 있었다. 이에 이불 위에 조복(朝服)을 얹고 패지(牌旨)를 받았는데 조금 뒤에 숨을 거두니 곧 7월 초하루이다.

판서 한치응(韓致應)이 애석해 하여 마지않으면서,
“문질(文質 외관의 미와 실질)이 겸비하기로는 우리 무리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고, 사림(士林)도 모두 슬퍼하였다. 당로(當路)의 경대부(卿大夫)로서 이를테면 판서 김로경(金魯敬), 참찬 신재식(申在植), 승지 유화(柳訸) 같은 무릇 공을 깊이 아는 사람은 모두 ‘남인은 사람의 수가 줄었다.’라고 하였다.

공은 여러 서적들을 두루 보고 감별(鑑別)이 정밀하였으나, 거두어 간직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근후(謹厚)하고 말이 적으며 평생에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강진(康津)은 호향(互鄕)이건만 온 고을이 모두 현사(賢士)라 하였고 벼슬길은 나그네와 같건만 친한 사람은 모두 길사(吉士)라 하였다. 앞길이 더욱 멀고 먼데 중도에 돌아갔으니 아, 슬프도다.

목리(牧里)의 서쪽에 옹중산 소서(翁仲山小墅)가 있으므로 자호를 옹산(翁山)이라 하였다. 그 동쪽에 용혈(龍穴)이 있으니 자못 천석(泉石)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또 그 서쪽에 농산별업(農山別業)이 있으니, 덕룡산(德龍山) 모든 봉우리가 나열하여 그 집과 마주하고 있으며, 조석루(朝夕樓)가 있어 산의 푸르름을 움켜 쥐고 있다. 옛날 나와 함께 노닐 제 봄가을 좋은 날이면 조기를 회치고 낙지를 삶아서 술잔도 기울이고 시도 읊으며 즐겁게 한번 배불리 먹었다.

공이 이사한 지 6년이 지난 무인년(1818, 순조 18)에 내가 비로소 북으로 돌아와서 초라담(鈔鑼潭)에 배를 띄워 물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하면서 함께 만년을 소요하며 우환을 같이 근심하고 안락을 같이 즐기면서 사돈간의 좋은 정을 누리었다.

공의 전원(田園)이 모두 남방에 있어 천리 밖에서 식량을 공급하니 늘 넉넉하지 못하였다. 과거에 오른 뒤에는 집안 형편이 더욱 영락(零落)하여져 한 해를 계획할 수 없었으되 공이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것 때문에 끝내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그런데 풍등 석화(風燈石火)처럼 손가락을 퉁기듯 변하여 꺼져버리니 슬프도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사인(士人) 백언(百彦)의 딸이다.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구림처사(鳩林處士) 광수(光秀)의 딸이다. 3남을 낳았다. 맏아들은 창모(昌謨)이니 자는 백하(伯夏)이고, 다음은 창훈(昌訓)이니 자는 중하(仲夏)이고, 다음은 창고(昌誥)이니 계주(季周)이다. 공의 이름과 자 때문에 《서경(書經)》의 체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창모 등은 각기 소생이 있는데 자녀가 어려서 적지 않는다.

무덤은 초부(草阜)의 북쪽 오곡(烏谷)의 서쪽, 곤좌 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남방 사람은 공의 이사를 아쉬워했고 / 南方之人兮惜公徙
북방 사람은 공의 죽음을 아쉬워했네 / 北方之人兮惜公死
자신부터 중시조(中始祖)되어 북종이 되었고 / 自我爲祖兮爲北宗
면면하고 무성하여 공가(公家 왕실)에 벼슬하리라 / 緜緜薿薿兮仕于公

公諱書有,字皆甫,海南之尹也。中世徙居康津。尹氏之跡,始顯於漁樵隱者 孝貞,其子橘亭 衢,爲湖堂學士,孝貞之兄孝禮,亦有行誼,公之祖也。其後綿綿,或以蔭仕。曾祖父諱弘佐,祖父諱克孝,皆未顯。父諱光宅,亦以布衣終。然爲人沈鷙豪邁,積貲至千萬,樂施而急人,好賓客,尙意氣。我先人知和順縣時,往游白蓮洞,路由康津,訪公於牧里之墅,歡諧竟夕,留詩以別,此乾隆戊戌間事也。又析財以予諸弟,鞭策諸子姪,力學以績文,定祭禮,修祭器,娶婦以棉布爲玄纁,傳之爲家法,出納不吝,行丐者號之爲海龍公,盖尹 氏之中祖也。以乾隆甲申十一月二十八日,生公于牧里。旣就學,別設書堂於山東深谷中,邀進士尹殷緖以傅之,殷緖故博文善誨。旣冠,送于珍山,以習經義科,卽余之舅家也。書卷筆墨之外,不齎以錢貨,令凍餒以苦筋骨,飯疏食以淸脾胃,其敎子以義方如是。故公生長富厚,而能崇儉約厭紛華,敦行謹言,文識贍博,非俗儒可及也。庚戌間,公北游京都,謁李公 家煥于少陵,又與吾昆弟定交。後十二年辛酉冬,余自長鬐轉而適康津。當是時,凡與余及少陵好者,咸離網罟,公亦速獄于道康,無證乃出者菫數月,以此惴惴不敢相問。厥明年壬戌冬,公以親命遣其從父弟詩有,潛入邑以相見,遺酒肉以慰之曰:“伯父感念昔年,以爲故人之子,窮困投吾鄕,吾雖不能館穀,獨以畏約之故,遂闕問遺哉!” 自玆或夜來以續情好。適金校理 履載,謫居臯夷島,因余而識公之兄弟,盛言世網太密,吏屬咸悟,遂往來無閼。及余徙居茶山,益與公家近不十里,公遣子昌謨,就余學經史,遂與議婚姻,遂與議遷徙。嘉慶壬申,昌謨委禽于我家,厥明年癸酉,公全家北渡,始居于歸魚村,今又比鄰。此其兩家相與之本末也。公以經義再中鄕試,旣居北方之越四年丙子秋,中庭試丙科第十三人,厥明年權知承文院副正字。公年五十四,法當陞六品,黨人有害之者,銓曹留之。戊寅夏,沈公 象奎判東銓,直注爲成均館典籍,秋移司憲府監察。己卯夏,移社稷署令,冬季陞禮曹正郞。庚辰秋,延詔使赴都監。道光辛巳春,孝懿王后登遐,公又差殯殿都監郞有勞。夏六月寢疾,旣革除司諫院正言,有召牌,加朝服于衾以受牌,俄而屬纊,卽七月初一也。韓判書 致應,嗟惜不自已,謂:“文質兼備,吾黨未易得也。” 士林皆悼,而當路卿大夫若金判書 魯敬ㆍ申參判 在植ㆍ柳承旨 訸,凡知公深者,咸曰:“南人減人數也。” 公博覽群書,鑒別精核,而斂然不自衒,謹厚寡言,平生不言人臧否。康津互鄕也,一鄕咸以爲賢士,朝路羇旅也,親者皆謂之吉士。進塗悠遠,而廢於中道,嗚呼,其可悲也!牧里之西,有翁仲山小墅,自號曰翁山。其東有龍穴,頗有泉石之勝,又其西有農山別業,德龍山諸峰羅列對戶,有朝夕樓,以挹山翠。昔與余同游,每春秋佳日,膾鮸魚,瀹章擧,以觴以詠,歡然一飽。公徙之越六年戊寅,余始北還,汎于鈔鑼之潭,以沿以濯,消搖晚景,與共憂患,與共安樂,以享朱ㆍ陳之好。公田園皆在南,千里餽糧常不給,旣登科,家益落,無歲計,以公通籍金門,卒無悔色。風燈石火,彈指變滅,悲夫!母驪興 閔氏,士人百彦之女。配昌寧 曹氏,鳩林處士 光秀之女。生三男,長曰昌謨字伯夏,次曰昌訓字仲殷,次曰昌誥字季周,以公之名與字,而名之以書體也。昌謨等各有所生子女,幼不錄。墓在草阜之北,鳥谷之西,負坤之原。銘曰:
“南方之人兮惜公徙。北方之人兮惜公死。自我爲祖兮爲北宗。緜緜薿薿兮仕于公。”
 298 ~ 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