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

南臯尹參議墓誌銘

남고(南皐) 윤 참의(尹參議)의 묘지명

옛날 선조(先朝) 갑인년(1794, 정조 18) 9월 중순(中旬)에 남고(南皐) 윤공(尹公)이 벗 5~6인을 데리고 백운대(白雲臺) 꼭대기에 올라 마음껏 읊조리고 노래하되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는데 용(鏞)도 참여하였다. 돌아와서는 죽란 서옥(竹欄書屋)에서 국영(菊影)의 촛불을 베푸니, 모인 사람이 8~9인이었는데 남고(南皐)가 주맹(主盟)이었다. 술에 취하자 각각 시 수십 편을 짓되 성조(聲調)가 격렬한 것만 취하고 그 나머지는 취하지 않았다. 선중씨(先仲氏 여기서는 정약전(丁若銓)) 손암 선생(巽庵先生)ㆍ한혜보(韓徯父 혜보는 한치응(韓致應)의 자)ㆍ채이숙(蔡邇叔 이숙은 채홍원(蔡弘遠)의 자)ㆍ윤무구(尹无咎 무구는 윤지눌(尹持訥)의 자) 등 제인(諸人)이다. 공을 추대하여 사백(詞伯)으로 삼았다. 

시 한 편을 지을 적마다 공이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히 읊는데 굽이쳐 맑게 넘어가니 온 좌석이 고요하게 말없이 공의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이때에 번옹(樊翁 채제공(蔡濟恭)을 말함)이 상부(相府)에 있고 대릉(大陵 오사(五沙) 이정운(李鼎運))과 소릉(少陵 정헌 이가환)의 재보(宰輔)가 임목(林木)처럼 늘어섰으며, 나이 50이 못된 이가 또 뒤따라 모였다. 풍류(風流)가 온자(醞藉 너그럽고 여유 있는 모양)하여 일컬을 만한 점이 있었으니 참으로 울연(蔚然)히 성대한 시대였다.

그런데 6년이 지난 기미년(1799, 정조 23)에 봄에 번옹(樊翁)이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 여름에 선대왕(先大王 정조를 말함)이 승하하고, 그 이듬해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용은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용과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은 모두 억울하게 죄에 걸리고 그릇되게 함정에 빠져, 풀을 베듯 새를 사냥하듯 연좌율(連坐律)로 논죄(論罪)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죄망(罪網)에 걸릴까 두려워하였다. 공이 이때 장기(長鬐)의 유배지(流配地)로 내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왔다.

두멧골서 산발하고 획연(劃然)히 읊조리니 / 巖阿散髮劃長吟
바다는 아득하여 만리나 멀구나 / 瀛海茫茫萬里深
맑은 눈물 하만자(河滿子)에 흘리지를 말게나 / 淸淚莫垂何滿子
희음(希音)은 다행히도 광릉금(廣陵琴)을 보존하네 / 希音幸保廣陵琴
어찌 친한 벗 없으랴만 편지 오는 것 없구나 / 豈無親友無書到
다만 고향집 있어 꿈속에서 찾도다 / 秖有家鄕有夢尋
천고토록 백운대 무너지지 않거니 / 千古白雲臺不圮
우리 옛날 노닐던 곳 길이 남아 있으리 / 長留吾輩昔曾臨

용이 이 시를 받아보고는 깜짝 놀라 혀를 내두르며 공처럼 맑고 말쑥하던 이가 그 침중(沈重)하고 굳셈이 이에 이른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 공이 원주에서 뱃길로 두릉(斗陵)에 들러 나의 처자(妻子)를 조문하고 마침내 서루(書樓)에서, 다산(茶山)에서 지은 나의 여러 시들을 요구하여 또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하게 읊는데 비분 격절(悲憤激切)하니 듣는 이는 눈물을 흘렸다 한다.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용이 은전(恩典)을 입어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 수년 뒤에 공이 또 원주로부터 나에게 들러 3일을 묵었는데, 20년 답답한 회포를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신사년(1821, 순조 21) 가을에 공이 죽었다. 그 이듬해 공의 아들 종걸(鍾杰)이 공의 시문(詩文) 등 유고(遺藁) 20여 권을 보내와 말하기를,

“선인(先人)을 아는 이는 옹(翁 다산을 말함)이시고 선인의 마음을 아는 이도 옹이시고, 선인의 시와 문(文)을 아는 이도 옹이시니, 선택하여 편집하고 서문을 지어 권두(卷頭)에 붙이는 것도 오직 옹께서 할 일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나는 천하(泉下) 사람이니, 감히 문자로 공을 누되게 할 수 없다. 오직 천하(泉下)의 명(銘)은 유심(幽深)하여 멀리 미칠 수 있으니 내가 그것을 지으리라.”

공의 행장을 상고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휘(諱)는 지범(持範)이니, 신유년(1801, 순조 1)에 규범(奎範)으로 고쳤고, 자는 이서(彝敍)이며, 남고(南皐)는 호이다.

윤씨(尹氏)는 대대로 해남(海南)에 살았는데, 그 근원이 매우 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진사(進士) 효정(孝貞)이 있으니, 어촌(漁村)과 산촌(山村)에 은거하면서 후예의 으뜸이 되었다. 이분이 귤정(橘亭) 구(衢)를 낳으니 벼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이르렀고, 이분이 홍중(弘中)을 낳으니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으며, 자식을 두지 못하여 그의 아우 좌참찬(左參贊) 의중(毅中)의 아들 유기(唯幾)를 데려다 후사로 삼았는데, 벼슬은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르렀다. 감사가 또 자식이 없어 그의 형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유심(唯深)의 아들 선도(善道)를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이분이 곧 우리 고산선생(孤山先生)이다.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충헌공(忠憲公)으로 사시(賜諡)되었다. 이분이 인미(仁美)를 낳았는데 고산(孤山)이 세상에 거슬림을 받은 것 때문에 벼슬은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그쳤다. 이분이 휘 이석(爾錫)을 낳으니 음사(蔭仕)로 종친부 전부(宗親簿典簿)를 지냈다.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휘 이후(爾厚)의 아들 두서(斗緖)를 후사로 삼으니 공에게 증조가 된다. 어질고 재예(才藝)가 많아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으며, 호를 공재(恭齋)라 한다. 조부의 휘는 덕현(德顯)이니,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스스로 숨겼으며 호를 포상로인(浦上老人)이라 하며 공재(恭齋)는 9남을 두었는데 그 넷째이다.

아버지의 휘는 위(愇)이니 문장과 덕행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으며 호를 범재(泛齋)라 한다. 용이 옛날 그 유고(遺稿)에 서를 썼다.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이니 정랑(正郞) 휘 시경(時敬)의 딸이고, 병조 판서 목창명(睦昌明)의 증손이다. 건륭(乾隆 청 고종(凊高宗)의 연호) 임신년(1752, 영조 28) 12월 2일에 한양(漢陽) 남쪽, 청파(靑坡)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자 이미 독서(讀書)할 줄 알았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곡읍(哭泣)의 애통함이 성인(成人)과 같으니, 보는 이는 감읍(感泣)하였다. 외가에 의탁하여 어머니의 교회(敎誨)를 받았다. 낮에는 밖에서 스승을 따라 글을 배우고 밤에는 돌아와 등불 밑에서 글을 읽는데 '과부의 아들이 드러남이 있지 아니하면 그와 더불어 벗하지 않는다.’ 한 데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려 슬퍼하고 더욱 스스로 각고 노력하였다. 혹 때가 지나도록 즐겁게 놀다가 어머니가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이 있으면 공은 기미를 살펴 곧바로 고치고 부드러운 얼굴빛과 목소리로 만단(萬端)으로 위로하여 그 노한 얼굴빛이 풀어짐을 본 뒤에야 그만두었다.

10세에 이미 이름이 도성 안에 울렸다. 판서 이지억(李之億)과 채상국(蔡相國 제공(濟恭))이 모두 그 이마를 어루만지며 칭찬하였다.
“이 아이는 문학과 조행이 함께 진취하였으니 참으로 보물이다.”

정해년(1767, 영조 43)에 조모의 상을 당하고 무자년(1768, 영조 44)에 해남(海南)으로 내려왔는데, 향촌(鄕村)이 외지고 비루(鄙陋)하였다. 공은 더욱 정신과 생각을 가다듬어 문사(文史)에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년(영조 48, 1772)에 조부의 상을 당하였다.

건륭 정유년(1777, 정조 1)은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이 등극한 원년이다.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 공이 장원(壯元)하고 마침내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병과(丙科)로 뽑히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얼굴은 옥을 깎아놓은 듯하고 문사(文詞)는 아담하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일찍 과거에 올랐으니, 법으로는 조정에 벼슬하여 예원(藝苑)에 꽃다운 이름을 드날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충헌공(忠憲公 윤선도(尹善道)의 시호)의 후손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방해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관례에 따라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부직(付職)하고, 12년 동안 바다 모퉁이에 묻히어 갈부(褐夫 너절한 옷을 입은 천한 사람)와 같았다. 그러나 공은 개의하지 않고 태연히 날마다 시를 읊고 글을 지었다.

기유년(1789, 정조 13) 여름에 우리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수원부(水原府) 북쪽에 개장(改葬)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길지(吉地)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충헌공(忠憲公)이 일찍이 효종(孝宗)의 장지(葬地)로 천거한 터이다. 주상이 바야흐로 옛날 일을 생각하므로, 주서(注書) 심규로(沈奎魯)가 공을 천거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는데, 서전(西銓 병조(兵曹))이 또 군직(軍職)을 임명하지 않았다. 주상의 책유(責諭)가 매우 엄하여 그날 밤으로 전관(銓官)을 불러 임명하도록 하였다. 10월에 현륭원(顯隆園)에 장사를 마쳤다. 그 이듬해 경술년(1790, 정조 14) 여름에 공이 죽포(竹圃) 심규(沈逵)의 집에 사관(舍館)을 정하였다. 공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특별히 제수하고, 이튿날 경모궁 영(景慕宮令)으로 제수하고 또 그 이튿날 병조 좌랑에 제수하였다. 시기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마지않으면 장차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될 것이다.”

하였다. 적신(賊臣) 권유(權裕)가 상소하여 충헌공(忠憲公)을 폄하(貶下)하여 무함하였으니, 그의 의사는 영원히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공은 즉시 병을 핑계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주상이 오히려 체직(遞職)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감군(監軍)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공은 명패(命牌)를 받지 않았다.

주상은,
“왕역(往役)을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고, 정원(政院)의 사령(使令) 10인을 보내어 명패를 받도록 재촉하였다. 사령이 거리에 서로 잇달았으되 공은 그래도 동요하지 않았다. 주상이,

“마땅히 군율(軍律)로 종사(從事)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니, 정랑(正郞) 이복윤(李福潤)이 와서 주상의 하유(下諭)를 전하였다.

마침 주상이 효창묘(孝昌墓)에 거둥하였는데, 공이 길가에서 대죄(待罪) 하였더니, 주상은 좌승지 권엄(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