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

司憲府持平尹 无咎 墓誌銘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무구(尹无咎)의 묘지명

군은 휘는 지눌(持訥)이고 자는 무구(无咎)이다. 뒤에 규응(奎應)으로 개명하고, 호를 소고(小皐)라 하였으며,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원조(遠祖) 존부(存富)는 고려 사람이니 그 뒤에 면면히 이어졌다. 아조(我朝 조선조를 말함)에 들어 와서 진사 효정(孝貞)이 있었으니 청사(淸士)로 이름났다. 이 분이 귤정(橘亭) 구(衢)를 낳았는데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에 종계(宗系)가 자주 끊어져 후사를 세워 계승한 이가 많았다.

종계로는 귤정의 아들 예조 정랑 홍중(弘中), 강원 관찰사 유기(唯幾), 예조 참의 충헌공(忠憲公) 선도(善導),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인미(仁美), 종친부 전적(宗親府典籍) 이석(爾錫), 진사 공재선생(恭齋先生) 두서(斗緖)가 그 6세이다.

혈맥으로는 귤정의 아들 좌참찬(左參贊) 의중(毅中),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유심(唯深), 참의 선도(善道), 진사 의미(義美), 사헌부 지평 이후(爾厚), 진사 두서(斗緖)가 그 6세이다. 그런데, 이후(爾厚)는 또 출계(出系)하여 숙부 예미(禮美)의 후사가 되고, 예미는 또 출계하여 숙부 선언(善言)의 후사가 되었으니, 선언(善言)은 충헌공의 아우이고, 유기(唯幾)도 본래는 또한 좌참찬 의중의 아들이다.

공재(恭齋)의 아들이 9인인데 셋째가 덕훈(德熏)이니 군에게 조부가 된다. 아버지의 휘는 운(惲)이고,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니 아버지는 호(澔)이고 두 형은 광수(光洙)와 광하(光河)로 다 문사(文詞)로 세상을 울렸다. 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고, 보령(保寧)에 살았다. 2남을 낳았는데 군이 막내이다. 건륭 임오년(1762, 영조 38) 11월 11일에 태어났으니 나와 동갑이며, 또 이성 형제(異姓兄弟)인데 군이 아우가 된다.
기유년(1789, 정조 13) 겨울에 우리 정종대왕이 수원부(水原府) 북쪽에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개장(改葬)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 개호(改號)하였다. 충헌공이 옛날에 이 언덕에 효종의 능을 의논한 적이 있었으므로 주상이 바야흐로 먼 옛날의 일을 생각함이 있었다. 군이 이때에 서울에 노닐었는데, 내가 군에게 북한 승방(北漢僧房)에서 독서하기를 권하였다.

그 이듬해 경술년(1790, 정조 14) 2월에 주상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알성(謁聖)하고 선비를 시험하였는데 군이 병과(丙科)에 합격하였으니 바로 김경(金憬)의 방(榜) 아래이다. 이름을 부를 적에 상은 군이 충헌공의 후손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여 반가운 안색을 보였다. 며칠 뒤에 선발하여 규장각 월과문신(奎章閣月課文臣)에 예속시키고 며칠 뒤에 한림회권(翰林會圈)을 명하였다. 번암(樊巖) 채 상국(蔡相國)과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심능적(沈能迪)ㆍ김이교(金履喬)ㆍ정문시(鄭文始)ㆍ홍낙유(洪樂遊)ㆍ약용ㆍ윤지눌(尹持訥) 등 6인을 선발하였다. 주상이 즉위한 이후로 비로소 이런 회탕(恢蕩)하는 은전이 있었는데, 군은 또 충헌공의 후손이었다.

당인(黨人)이 크게 놀라,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한림의 천거 설발이 사정에 의해 행해졌다고 논하므로 6인이 모두 소시(召試)에 나아가지 않았다. 주상이 크게 노하여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당시의 명사를 나오게 하여 엄준하게 책유(責諭)하고 남을 모함한 붕당(朋黨)을 죄주니, 뭇 신하들이 다리를 떨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날 나와 김이교가 피선(被選)되어 한림에 들어갔다. 몇 달 뒤에 주서(注書) 심규로(沈奎魯)에게 명하여 당장 윤지눌을 천거하여 승정원 주서로 삼도록 하였다.

6월에 병조 좌랑에 승진되고 사헌부 지평에 특제(特除)되었다가 얼마 뒤에 특지로 상원 군수(祥原郡守)에 보임되어 나가니, 총대(寵待 총애하여 대우함)의 융숭함과 시용(試用)의 빠름이 당세에 비할 바가 없었다.
신해년(1791, 정조 15) 여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고향에 반장(反葬)하고 서울에서 상제 노릇을 하였다. 겨울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있었다. 악인 홍희운(洪羲運)이 기회를 타서 선류(善類)를 모함할 양으로 성언(聲言)하기를,

“윤씨(尹氏)의 별족(別族 다산을 가리킴)이 채 상공(蔡相公) 및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상서(上書)하였다.”

하였다. 군이 기미를 살피지 못하고 드디어 나와 화협(和協)하지 못하였으며 주상도 또한 그를 부족하게 여겼다. 계축년(1793, 정조 17)에 상을 마치고 침체하여 조용(調用)되지 않은 지 수년이 되었다. 그러나 사여(賜與)와 권념(眷念)은 여전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이후 남고(南皐) 윤지범(尹持範)씨가 은혜를 받아 정언(正言)ㆍ지평(持平)이 되고 군도 또한 내부(內府)체 출입하였다. 을묘년 여름에 주상이 주서(注書)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주상의 의사는 유모(柳某)에게 있었으나 군은 굳이 우리 선중씨(先仲氏) 천전(天全 정약전의 자(字)임)을 천거하려 하였다. 주상이 재삼 끌어 유시하였으나 그래도 바꾸지 않았다. 주상이 노하여 철원부(鐵原府)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석방하니 적소(謫所)에 있은 지 며칠 만에 돌아왔다. 그 확고함이 이와 같았다.
경신년(1800, 정조 24)에 주상이 승하하니, 군이 남고(南皐)와 상소하여 태비(太妃 영조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복제(服制)를 논하려 하다가 내 말을 듣고 선뜻 그만두었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내가 열수(洌水) 가에 있었다. 한성부(漢城府)에 서급(書笈 책을 넣어서 등에 지고 다니도록 만든 상자)의 사건이 있어서 화기(禍機)가 혹렬한데도 옛날에 서로 친했던 사람들도 누구 하나 알려 주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군과 이주신(李周臣 주신은 이유수(李儒修)의 자)만이 의논하여 편지로 통보해 왔다. 내게 서둘러 입경(入京)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진흙탕길을 무릅쓰고 빨리 달려갔다. 밤에 주신(周臣)과 함께 군의 집에 모였다. 군이 작은 화로에 인삼 세 뿌리를 달여 나에게 권하면서 말하였다.

“혹 군의 정신이 주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내가 옥에서 나오자 내 두 아이가 나를 하남(河南)으로 전송하고 도로 입경하니, 군이 이주신과 더불어 왜남비에 고기를 구워 먹이고 울면서 이불 속에 들게 하고 서로 껴안고 자고 헤어졌다. 아, 말세의 풍속에 몇 사람이나 이렇게 할 수 있으랴.

악당(惡黨)이 본디 군을 미워하였고, 또 군의 누이가 강준흠(姜浚欽)의 백모(伯母)가 되어 아들 복흠(復欽)을 낳았는데, 강준흠이 먼 일가집 아들을 취하여 그 종통을 잇고 복흠 모자를 내쫓으므로 군이 그 인륜을 어지럽힌 일을 공공연히 말하였다. 이 때문에 악당이 기필코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주신은 북쪽 변방으로 귀양가고 군은 끝내 무사하였으므로 드디어 호중(湖中)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처음에는 한산(韓山)에 살다가 또 서천(舒川)으로 옮겼다.

금상(今上 순조를 말함)이 잠리(簪履 벼슬이 높은 사람)를 생각하여 사헌부 장령을 특제(特除)하니, 군이 소를 올려 채 상국(蔡相國)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려 하였으나 벼슬이 갈리어 그만두었다. 을해년(1815, 순조 15) 월 일에 미질(微疾)로 죽으니 아, 애석하도다.

군의 사람됨은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여 의심없이 과감히 실행하였으며, 뜻에 옳게 여기는 바는 곧 끓는 물과 뜨거운 불에도 뛰어들 수 있었다. 계축년(1793, 정조 17) 이후로 오로지 천전(天全)정 약전(丁若銓)과 좋아하여 날마다 이주신(李周臣) 유수(儒修) ㆍ한혜보(韓徯父) 치응(致應) ㆍ윤외심(尹畏心) 영희(永僖) ㆍ강인백(姜仁伯) 이원(履元) 과 남산 아래에 모여 술을 실컷 마시며 온갖 놀이를 하는데 혹은 소릉(少陵)에서, 혹은 직금방(織錦坊)에서 하여 그 처소를 자주 바꾸었다. 내가 채이숙(蔡邇叔) 홍원(弘遠) 과 그 단정하지 못함을 자주 꾸짖었으므로 배척하고 이 모임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감분(感憤)하고 비탄(悲歎)하며 유속(流俗)의 꾸며대고 아첨 잘 하는 태도를 흘겨보았다. 오직 한혜보(韓徯父)만은 술을 조금만 마시면 곧 취하였으므로 방언(放言 말을 함부로 함)이 없었다. 천전(天全)이 일찍이 말하였다.

“너는 아무 판서(判書), 아무 시랑(侍郞)과 사이좋게 지내고, 나는 주도(酒徒) 몇 사람과 이처럼 미친 듯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고 물이 용솟음치듯 시세가 험악해지면, 어떤 사람이 서로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유년(1801, 순조 1)에 화(禍)가 일어나자 이들 몇 사람은 평소처럼 서로 감싸주었다. 외심(畏心)이 대관(臺官)에게 정대하게 말하여 우리 형제의 사생(死生)을 보살폈고, 인백(仁伯)은 화원(花園)에서 부르짖어 울며 술에 취하여 우리 형제를 찾되 마치 그 좌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그런데 지체 높은 제대부(諸大夫)들은 바야흐로 연소(聯疏)하여 나를 공격하였으니 아, 이것은 내가 가형(家兄)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군은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신 부인(申夫人)은 글을 잘하였다. 이소(二蘇)의 누이처럼 글을 잘하였다. 이 때문에 훈회(訓誨)를 받은 바가 많았다. 그가 지은 시를 들으면 이따금 청경(淸警)하여 그 외숙(外叔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의 시풍(詩風)이 있었으나, 다만 문묵(文墨)에 힘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또한 흩어두고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는 바가 없다.
중년에 가난이 심하자 아쾌(牙儈 거간꾼)를 불러 말하기를,

“이 소릉(少陵)의 집은 본값이 9만 전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귀신 많은 집을 구해다오. 싼값의 집으로 몸을 비호하고 남은 돈 4~5만 전으로 내 술빚을 갚을 수 있다.”

하니, 아쾌는,

“소공주(小公主) 거리에 귀신 많은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너무 드세어 거주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군은 곧바로 그 집으로 들어가서 더러운 뜨락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 귀신을 위해 받들던 남색 철릭, 자색 준립(駿笠), 누른 바지, 붉은 치마 등을 가져다가 불태워 버리고, 그 쌀을 일어 밥을 짓고 그 돈꾸러미를 찾아내어 술을 사고 홍어를 씻어 국을 끓여 처첩(妻妾)과 비복(婢僕)들과 즐겁게 배불리 실컷 먹었다. 이날 밤에 귀신이 드디어 가버리고 다시는 신음하고 한탄하는 귀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다.

부인 숙인(淑人)은 …… (원문 빠짐) …… 씨(□氏)인데, 자식을 낳지 못하여 종조 형제(從祖兄弟)의 아들 종대(鍾待)를 취하여 후사로 삼으니, 자는 계황(季黃)이다. 계황은 3남을 두었는데 모두 빼어나고 문사(文史)에 능하니, 무구(无咎)는 후손이 있다고 하겠다. 무덤은 …… (원문 빠짐) …… 의 언덕에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귐의 성위는 / 交之誠僞
환난에서 결정되고 / 決於患難
선비의 청탁은 / 士之淸濁
상란에서 구별된다 / 別於喪亂
내 형편이 바야흐로 좋을 적엔 / 我之方穀
그대가 내 꾸지람을 받았는데 / 子受我訕
내가 쓰러지게 되어서는 / 旣顚旣踣
그대만이 배반하지 않았네 / 唯子弗畔
술도 마실 수 있고 / 酒亦可飮
바둑도 둘 수 있었네 / 棋亦可翫
겉만 굳세고 속이 무른 건 / 色厲內荏
군자는 치지를 않는다 / 君子不算


君諱持訥。字无咎。後改名奎應。號曰小臯。海南之尹也。遠祖存富。高麗人。其後緜緜入。我 朝有進士孝貞。負淸士名。是生橘亭衢。弘文館學士。 賜暇湖堂。其後宗系數絶。多立後以繼之。以宗系則橘亭之子禮曹正郞弘中。江原觀察使唯幾。禮曹參議忠憲公善道。成均學諭仁美。宗親府典簿爾錫。進士恭齋先生斗緖。其六世也。以血脈則橘亭之子左參贊毅中。禮賓寺副正唯深。參議善道。進士義美。司憲府持平爾厚。進士斗緖。其六a281_352a世也。而爾厚又出爲叔父禮美後。禮美又出爲叔父善言後。善言者忠憲之弟。唯幾本亦左參贊之子也。恭齋之子九人。其第三曰德熏。於君祖父也。父諱惲。母高靈申氏。父曰澔。二兄曰光洙,光河。皆以文詞鳴。官至承旨。家於保寧。厥生二男。君其季也。生於乾隆壬午十一月十一日。與余同年。又異姓兄弟。而君爲也弟。己酉冬。我 正宗大王改葬 莊獻世子於水原府北。改號曰顯隆園。忠憲公昔嘗有議於斯丘。故 上方曠然有思。君以此時游京師。余勸讀書于北漢僧房。厥明年庚戌二月。 上幸太學。謁聖試士。君中丙科。卽金憬榜下也。唱名。 上知其爲忠憲孫。大悅賜顏色。後數日選隷奎章閣月課文臣。後數日 命翰林會圈。樊巖蔡相國,大提學洪良浩。選沈能迪,金履喬,鄭文始,洪樂游,丁若鏞,尹持訥等六人。旣御極以後。始有此恢蕩。而君又忠憲之孫。黨人大駭。嗾臺官論薦選循私。六人竝不赴 召試。 上大怒。御仁政殿。進當時名士。責諭嚴峻。罪朋黨傾軋。羣臣股栗。莫敢仰視。其日余與金履喬被選入翰林。後數月。 命注a281_352b書沈奎魯亟薦尹持訥爲承政院注書。六月陞兵曹佐郞。特除司憲府持平。尋以 特旨出補祥原郡守。寵待之隆。試用之驟。當世未有比也。辛亥夏。太夫人捐背。反葬而廬于京。冬有珍山之事。惡人洪羲運欲乘機盡陷善類。聲言尹氏別族上書于蔡相公及郡守申史源。君不能炳幾。遂與余不勰。而 上亦短之。癸丑服闋。沈淹不調者數年。然 賜賚眷念自如也。乙卯以後。南臯持範氏承 恩爲正言持平。而君亦出入內府。乙卯夏 上令薦注書。 上意在柳某。而君堅欲薦我先仲氏天全。 上提諭再三猶不變。上怒命投鐵原府。尋釋之。在謫數日而還。其牢確如此。庚申 上薨。君欲與南臯上疏論 太妃服制。旋以余止之。辛酉春。余在洌上。漢城府有書笈事。禍機猋烈。舊相親知者。無一人報知。獨君與李周臣議。書報余趣入京。金衡泥疾赴之。夜與周臣。會于君家。君於小罏。煎人參三根以飮之曰。或慮君精神未周也。旣自獄出。吾二兒送我于河南。還入京。君與周臣爲燒肉倭銚以食之。泣而納之于衾中。相抱持以宿而別。嗚呼。末俗a281_352c能幾人爲是哉。惡黨素嫉公。又公之姊爲姜浚欽伯母。生子曰復欽。浚欽取疎遠之子以繼其宗。黜復欽母子。君公言其亂倫。以故惡黨必欲害之。然周臣謫北塞。君卒無事。遂大歸于湖中。始居韓山。又徙于舒川。 今上記念簪履。特除司憲府掌令。君欲治疏訟蔡相國之冤。官遞而止。乙亥月日。以微疾卒。嗚呼惜哉。君爲人。樂善好義。果行不疑。意之所悏。卽湯火可蹈。癸丑以後。偏與天全好。若銓 日與李周臣 儒修,韓徯父 致應,尹畏心 永僖,姜仁伯 履元。會于南山之下。轟飮雜戲。或于少陵。或于織錦坊。屢易其處。余與蔡邇叔 弘遠 數詆其不端。故擯不與此會。皆感憤悲吒。睥睨流俗修飾脂韋之態。唯徯父飮少輒醉無放言。天全嘗曰爾與某尙書某侍郞善。吾與酒徒數人猖狂如此。然風起水涌。不知何者能不相負也。辛酉禍作。斯徒數人相呴嫗如平生。畏心昌言于臺官。以察吾兄弟死生。仁伯號哭於花園。醉索吾兄弟如在其左右。而薦紳諸大夫方且聯疏以攻余。嗚呼。此余不及家兄處也。君蚤孤而申夫人故善文。若二蘇之妹。以此受提誨多聞。a281_352d其爲詩往往淸警。有乃舅風。顧不屑屑。治文墨。亦散漫不收。以故無所傳。中年貧甚。召牙儈語之曰此少陵屋本値九萬。爾爲我求多鬼之屋。以輕價庇身。得贏錢四五萬。可防我酒債。儈曰小公主衕有屋多鬼。然鬼太縱不可居也。君亟往投之。滌淨糞除。悉取其所奉藍貼裏紫駿笠黃襦紅帬之等火燒之。淘其米爲飯。搜其錢沽酒。洗薨魚以爲羹。與妻妾婢僕歡然一飽。是夕鬼遂去。不復聞唫嘯之聲。配淑人 缺 氏不乳。取從祖昆弟之子鐘待爲嗣。字曰季黃。季黃有三男。皆英秀治文史。无咎其有後矣。墓在 缺 負 缺 之原。銘曰
交之誠僞。決於患難。士之淸濁。別於喪亂。我之方穀。子受我訕。旣顚旣踣。唯子弗畔。酒亦可飮。碁亦可翫。色厲內荏。君子不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