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17권 > 행장

玄坡尹進士行狀

현파(玄坡) 윤 진사(尹進士)의 행장

공의 휘는 흥서(興緖)이고 자는 효선(孝先)이며, 별자는 현파(玄坡)이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원년(1662, 현종 3) (임인) 가을에 태어나서 옹정(雍正 청 세종(淸世宗의 연호) 11년(1733, 영조 9) (계축) 봄에 돌아갔으니, 향년은 72세이다. 숙종대왕(肅宗大王) 기사년(1689, 숙종 15) 경의(經義)로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그때 공의 아버지 지평공(持平公) 또한 급제(及第)로 출신(出身)하여 부자가 동년(同年) 합격이므로 영예가 고을에 진동하였다. 공은 또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이름이 도하(都下)에 자자하게 일컬어졌는데, 사람들이 나라의 동량(棟梁)과 유림(儒林)의 우두머리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전 벽해(桑田碧海)를 여러 번 겪어 주옥(珠玉)이 물속에 빠져버린 채 거의 50년 동안이나 기구한 운명으로 쓸쓸히 지내다가 마침내 궁핍과 굶주림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손도 빈궁하고 침체하여 궁촌 벽지에 떠돌아다니면서 조상이 남긴 훌륭한 시문(詩文) 등을 백에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여 천년 뒤에 이름과 자취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공이 돌아간 지 76년 뒤에 내가 후생 말학(後生末學)으로서 비로소 공의 유고(遺槁) 1권과 가장(家狀) 1편을 취하여 공의 학문의 연원(淵源)과 조행(操行)의 대략을 서술하여 후세의 능언군자(能言君子)를 기다리려고 하나 이 또한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해남 윤씨 (海南尹氏)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휘 효정(孝貞)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나 크게 되었다. 이 분이 귤정(橘亭) 구(衢)를 낳았는데, 그는 벼슬하여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 들어갔다. 이 분이 예조 정랑(禮曹正郞) 홍중(弘中)을 낳았다. 정랑은 아들이 없어 그의 아우 좌참찬(左參贊) 의중(毅中)의 아들 유기(唯幾)를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이 분이 강원도 관찰사 (江原道觀察使)이다. 관찰공도 아들이 없어 그의 형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유심(唯深)의 아들 선도(善道)를 후사로 삼았는데, 이분이 우리 고산 선생(孤山先生)이다. 고산의 셋째 아들은 예미(禮美)인데, 아들이 없어 그의 형 진사(進士) 의미(義美)의 아들 이후(爾厚)를 후사로 삼았으니, 이 분이 공의 아버지인 지평공(持平公)이다. 지평공의 배(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아버지는 참봉(參奉) 사량(四亮)이다. 이분이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공은 그 중 둘째이며, 나의 외증조(外曾祖) 공재공(恭齋公)이 그 넷째이다.

국조(國朝)가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갑자년(1504, 연산군 10) 이래로 기묘(1519, 중종 14) 을사(1545, 명종 즉위년) 등의 유화(儒禍)가 여러 번 일어났는데,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 22)에 이르러서는 당옥(黨獄)이 마구 일어나 한 시대의 단아(端雅)하고, 방정(方正)한 선비들이 모두 마치 풀을 베듯, 짐승을 사냥하듯 마구 도륙되었다. 이 뒤부터 도학(道學)이나 명검(名檢 명예와 절개) 같은 것은 세상에서 크게 꺼리는 바가 되어 퇴계(退溪)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의 학문이 대령(大嶺 조령(鳥嶺))의 남쪽에만 전하고 있을 뿐, 서울 사는 사람과 귀한 집의 자제들은 육경(六經)을 변모(弁髦)처럼 여겨 제멋대로 거리낌없이 노닐었다. 

공은 옥동(玉洞) 이공(李公)과 더불어 적막한 가운데 끊어진 학문을 개연히 제창하였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원리를 분석하는 데는 옥동을 벗으로 하였고, 군신의리(君臣義理)의 심오한 이치를 밝히는 데는 서산(西山)을 벗으로 하였고, 이ㆍ욕(理欲)의 나뉨을 정밀하게 관찰하며 사욕을 이겨서 스스로를 닦는 데는 정재(定齋)를 벗으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 공재 선생(恭齋先生)은 그 사이에서 격려하고 창화(唱和)하였다. 그러자 일시의 천신가(薦紳家)의 자제로 빼어나고 뛰어나 고인의 풍도(風度)를 사모하는 자들이 모두가 이분들을 수택(藪澤)으로 여겨, 덕으로 교화하고 양육함으로써 장차 서로 더불어 조정에 진출하여 뜻을 펴 보기를 기대하였었다. 그런데 이윽고 서산은 절개를 지키다 죽고 정재와 공재는 요절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경술년(1730, 영조 6) 이후에는 사류들은 꺾이고 거실들은 넘어져 비색하고 불운하여 다시 당세의 기대가 없어졌다. 비록 옥동의 도학으로써도 세 자짜리 묘비(墓碑)에 하찮은 말 관장하는 벼슬[사복시(司僕寺)의 벼슬]을 명(銘)하였으며, 공 또한 빈궁하여 시골에 은거하면서 보잘것없는 누추한 집에서 살며, 싸라기도 배부르게 못 먹고 객지에서 죽었으니 아아, 슬프다. 공의 평생을 역술(歷述)하노라면 격앙하고 분이 넘쳐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옥동과 서산은 고(故) 홍문제학(弘文提學) 이공 하진(李公夏鎭)의 두 아들이며 정재는 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공 단(沈公檀)의 맏아들이다. 숙종(肅宗) 신미년(1691, 숙종 17)에 지평공이 함평 부사(咸平府使)로 있을 때, 이해 가을 알성시(謁聖試)가 있었는데, 공이 함평에서 올라와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막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 판에 심 판서(沈判書)가 고관(考官)으로 있었기 때문에 피혐(避嫌)하여 그를 빼어 버렸다. 이윽고 지평공은 벼슬을 버리고 팔산장사(八山莊舍) 영암군(靈巖郡) 남쪽 옥천방(玉泉坊)에 있다. 로 돌아갔는데, 공 또한 따라와서 은거하며 뜻을 길렀다. 그 후 6~7년이 지난 정축년(1697, 숙종 23)에 공의 아우 진사공이 당옥(黨獄)에 걸렸다. 무인년 겨울 공은 또 그 부인을 잃었고 이듬해 기묘년 가을에 지평공의 상을 당하여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는데, 이로부터 다시 서울집에서 지냈다. 을유년(1705, 숙종 31) 가을에 이르러 모부인(母夫人) 이 영인(李令人)의 상을 당하였고, 병술년에는 서산(西山)의 화가 있었다. 

정해년에 상(喪)을 마치고 강교(江郊)로 물러나 살았고, 신묘년(1711, 숙종 37)에는 광주(廣州) 남쪽의 판교촌(板橋村)에서 살았다. 경종(景宗) 2년에 서산이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되니 공이 팔애시(八哀詩)를 지었다. 당시 조정에 있는 여러 명경(名卿)들이 모두 위로하고자 하여 공을 천거하였다. 장차 포의로서 대성(臺省)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조정의 사정이 또 바뀌어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신년(1728, 영조 4)에는 가포(蒲)에서 난리가 있었는데, 적의 우두머리는 명문(名門) 출신으로 평소에 그와 얼굴을 알았던 사람은 화에 걸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나, 공은 혼인(婚姻)한 집안이면서도 초연히 홀로 면할 수 있었다. 진실로 굳고 곧아 규벽(奎璧)처럼 더럽힐 수 없는 절조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실천하는 공정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겠다.

기유년(1729, 영조 5) 봄에는 판교(板橋)에서 결사(結社)하여 고을의 소년들을 모아서 학문르 가르치고 기예를 익히게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이택사(麗澤社)이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몇 집 안 되는 거친 마을이 문향(文鄕)으로 바뀌어 풍류와 문채가 융성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영광이 이어졌으니, 그 깊이 스며든 교화의 힘을 이에서 징험 할 수 있겠다.

옥동이 이미 죽은 뒤로 옥동의 아우인 성호 선생(星湖先生) 익(瀷)이 다시 가정(家庭)의 학문을 닦아 경술과 문장이 세상의 표준이 되었다. 공은 만년에 구부리고 그에게 나아가 오례(五禮)와 구경(九經)의 어려운 곳을 변정(辨定)하여 평생의 뜻을 이루었다. 그가 도를 즐기고 학문을 좋아함이 늙어도 쇠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를 좋아하는 이도 겨우 상례(喪禮)나 제례(祭禮)만을 지킬 뿐이지, 관례(冠禮)에 있어서의 초자(醮子)나 향음례(鄕飮禮)에 있어서의 수빈(酬賓) 등에 이르러서는 행하지 못하였다. 공이 개연히 이에 뜻이 있어 손수 관례(冠禮)ㆍ향례(鄕禮)의 여러 글을 초록하고 위차(位次)를 그려서 차례가 정연하여 일옥요연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책이 아직 남아 있어서 상고하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그 유묵(遺墨) 1권은 공이 젊었을 때에 쓴 것인데, 백가(百家)의 여러 기예를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역법가(曆法家)로서는 해가 빠르고 달이 느린 차이와 기(氣)는 차고 삭(朔)은 비는 쌓임을 분석하여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산술가(算術家)로서는 염우(廉隅 변과 각임)와 승제(乘除 곱하기와 나누기)의 법과 팔승(八乘)과 구층(九層)의 변화를 조리가 정연하게 해놓았으며, 점후가(占候家)로서는 괴운(魁雲)과 강풍(罡風 북풍 또는 강풍(剛風))의 기운과 동작(銅雀)ㆍ석연(石燕)의 징험을 유추하여 방통(旁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천(龍泉 칼이름)과 봉소(鳳沼 거문고 대)의 제도, 옹저(癰疽)와 양마(養馬)의 방법, 꽃을 가꾸고 채소를 심는 비결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진부한 말들은 씻어버리고 새로운 의론을 채록하였으니, 공의 해박함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1733, 영조 9) 봄 홍주(洪州)의 공서(公署)에 갔다가 마침내 병으로 졸하였으니, 그 날이 3월 29일이었다. 초배(初配)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전라 감사(全羅監司) 운징(雲徵)의 따님이며, 취죽(翠竹) 응시(應蓍)의 손녀이시다. 4남 1녀를 낳으셨으니, 아들은 덕근(德根)ㆍ덕상(德相)ㆍ덕림(德林)ㆍ덕모(德模)이고, 딸은 성덕언(成德彦)에게 시집갔다. 후배(後配)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아버지는 박(搏)이다.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 원문 1자 빠짐 …… (德□)ㆍ덕해(德偕)이고, 딸은 모두 시집갔다. 

처음에 공은 자질(子姪)들을 옥동에게 부탁하여 경례(經禮)를 배우게 하였는데, 덕근이 제일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년(1696, 숙종 22) 이래로 당옥이 여러 번 일어나자 마침내 과업(科業)을 폐하고 현구노포(玄丘老圃)라 자호(自號)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식(㥀)ㆍ협(愜)이다. 그 나머지 손자와 증손은 남녀를 합쳐 약간명이다. 공이 돌아갔을 때 홍주에서 옮겨다가 판교의 도성리(道城里)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씨는 부장하였으며, 권씨는 죽산(竹山) 사하평(沙下坪)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公諱興緖字孝先。別字玄坡。生於康熙元年壬寅之秋。歿於雍正十一年癸丑之春。享年七十二。以我 肅宗大王己巳之歲。爲經義進士。當是時公之父持平公。亦以及第出身。父子同年。榮動鄕閭。公又妙歲蜚英。名噪都下。人之期之。將以棟梁邦家。冠冕儒林。不幸滄桑屢變。珠玉沈淪。嶔崎歷落垂五十年。卒窮餓以歿。而子孫零替。流落窮荒。遺芬剩馥。百不存一。將使千載之下。名跡俱泯。不亦悲哉。公歿之後七十六年。鏞以後生末學。a281_374a始取公遺稿一卷家狀一篇。敍述公學問淵源。操履梗槪。以俟能言之君子。斯已晚矣。海南之尹。綿綿延延。至諱孝貞。始顯始大。是生橘亭衢。仕入玉堂。是生弘中禮曹正郞。正郞無子。取其弟左參贊毅中之子唯幾爲後。是爲江原道觀察使。觀察又無子。取其兄禮賓寺副正唯深之子善道爲後。是惟我孤山先生也。孤山之第三子曰禮美。無子取其兄進士義美之子爾厚爲後。是惟公之父持平公也。持平之配。全義李氏。父參奉四亮。寔生五子。公其第二。我外曾祖恭齊公其第四也。 國朝自弘治甲子以來。己卯乙巳儒禍屢起。至萬曆己丑。黨獄滋豐。一時端方之士。無不草薙禽獮。自是厥後。道學名檢。爲世大忌。退溪寒岡之學。獨傳於大嶺之南。而京輩貴游之子。弁髦六經。放曠不羈。公與玉洞李公。慨然倡絶學於寥寥之中。斯已難矣。剖天人性命之原則友玉洞。昭君親義理之奧則友西山。精察乎理欲之分。克己以自修。友定齋。而我恭齋先生旗鼓其間。塤箎相和。於是一世薦紳家子弟秀拔俊爽。翹翹然慕古人之風者。莫不以數公者a281_374b爲藪澤。薰陶鼓鑄。亭毓沈浸。以待夫茅茹之彙拔。已而西山死于節。定齋恭齋夭于天。星移物換。陵夷谷隆。下逮庚戌以後。士流摧殘。巨室顚隮。否塞屯固。無復當世不之望。雖以玉洞之道學而銘三尺以掌馬之官。公又淹延落魄。遯于郊棷。蓽門圭窬。糠粃不厭。而卒殞未耒陽之館。嗚呼悲夫。歷述公平生夷險。未有激昂憤厲汪然目淚之迸出也。玉洞西山者。故弘文提學李公夏鎭之二子也。定齋者。故吏曹判書沈公檀之長子也。 肅宗辛未。持平公宰咸平。是年秋謁聖試士。公自咸平赴擧得中。方唱名。沈判書以考官引嫌竟拔之。俄而持平公棄官歸八山莊舍。在靈巖郡南玉泉坊。 公亦隨至。隱居養志六七年。至丁丑之歲。公之弟進士公罹于黨獄。戊寅冬公又喪其耦。越明年己卯秋丁持平公憂。窆于揚州。自是再居京第。至乙酉秋。丁母夫人李令人憂。丙戌有西山之禍。丁亥服闋。退處江郊。辛卯寓接于廣州之南板橋村。 景宗二年。西山贈執義。公作八哀之詩。當是時。諸名卿在朝者。皆欲尉薦公。將以布衣入臺省。未幾朝局又變事遂已。戊申a281_374c有蒲之難。賊之渠帥出於名門。素相知面者。罔不罹禍。公以姻家。超然獨免。苟非堅貞不浼之操。如圭如璧。顧安得有是。其踐履之工。斯可驗矣。己酉之春。結社於板橋之鄕。以會鄕隣少年。令講學肄藝。玆所謂麗澤之社也。旣數年。鹵莽三家之村。化爲絃誦之場。風流文采。蔚然豹變。而科甲榮暢。項背相望。其浸潤之力。斯可驗矣。玉洞旣沒。玉洞之季星湖夫子瀷。復修家庭之學。經術文章。爲世標準。公之晚年。俯而就之五禮九經。往復辨難。以遂平生之志。其樂道嗜學。老而不衰。有如是矣。邦人好禮者。僅守喪祭之文。至於冠禮醮子鄕飮酬賓。莫之能行。公慨然有志。手鈔冠禮鄕禮諸文。圖寫位次。眉列掌示。今其書尙存。可按而知。又其遺墨一卷。蓋公少時之筆。而百家衆技。靡物不擧。以曆法家則日疾月遲之差。氣盈朔虛之積。剖析入微。以算術家則廉隅乘除之法。八乘九層之變。條理不紊。以占侯家則魁雲罡風之氣。銅雀石燕之徵。莫不推類而旁通。以至龍泉鳳沼之制。癰疽養馬之方。蒔花種菜之訣。亦皆疏瀹陳言。采錄新論。公之該a281_374d貫博洽。有如是矣。癸丑之春。往游洪州公署。遂以病卒。其日三月二十有九日也。初配完山李氏。全羅監司雲徵之女。翠竹應蓍之孫。擧四男一女。男曰德根,德相,德林,德模。女適成德彦。後配安東權氏。父曰搏。擧二男三女。男曰德 缺,德楷。女適人。初公以諸子姪託于玉洞。師受經禮。而德根爲高弟。丙子以來。黨獄屢起。遂廢科業。自號玄丘老圃。有二子曰㥀愜。其餘孫曾男女共若干人。公之喪至自洪州。葬於板橋之道城里乾坐之原。李氏祔焉。權氏葬於竹山沙下坪子坐之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