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군 대구면 수동리에는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재(군지정제30호와 도지정제27호)로 지정 등록되었다.

이 정자의 역사는 1550년대로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 년전 이 마을에 터를 잡은 해남윤씨 윤시성(尹時聖)이 이곳에 초당을 세운 것이 강회정의 모체이다.

그후 이곳은 유향소(留鄕所)로써 지장의 행정 사법기관으로 활용되어 오다가 1600년대에는 대동계원 자녀와 대구면 인근지역의 인재들을 불러모아 교육을 담당했던 강학소(講學所)로,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의 집강소(集講所)로, 일제치하에서는 야학운동의 거점지로 활용되는 등 언제나 역사의 복판에서 민족의식 고취의 산실로 자리했다.

또 강회정이 있는 이 마을은 해남윤씨 집성촌으로 400여 년의 세월을 보듬어온 역사만큼이나 크고 작은 역사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특히 1672년부터 강회정에는 해남윤씨 수곡공(壽谷公) 후손들이 13대째 이어온 문중규약과 명안계전(名案癸田), 대동내계안(大洞內契案) 등의 계(契)와 향약(鄕約) 관련 수많은 고문서들이 현존하고 있다.

강회정과 관련된 인물 가운데는 단연 해남윤씨 일가가 많다. 그 가운데도 동학운동 당시 강진접장 절암(節庵) 윤세현(尹世懸 1890-1934) 선생의 활동이 눈에 띈다 이곳 수동에서 태어난 절암은 육도(六道)라는 별칭도 있는데 이는 6개 도를 다니면서 천도교 홍보활동을 했다하여 붙여진 별호이다.

절암은 포덕(布德) 33년(임진년 1892) 1월 7일 천도교에 입도, 이듬해인 충청도 보은으로 건너가 해월선사(海月禪師)를 만나 동학사상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그후 절암은 갑오년(1894) 4월 수백 명의 동학군을 모아 고부에서 참전하였으며 그해 7월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 동학군 수천 명을 규합하여 11월 장흥의 이인환과 합세 보성, 장흥, 강진을 함락하는 전과를 세웠다.

3.1운동 당시 절암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할 뜻을 표명하였으나 천도교 지도부는 교세를 지키기 위해 절암은 남아야 한다고 만류, 끝내 민족대표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나라 잃은 울분을 삭여야 했다.

훗날 손병희 선생은 후임교주인 박인호 선생에게 교지를 내려 절암에게 은메달과 동메달을 상으로 내려 그의 불타는 민족혼을 격려했다.

이와 함께 강회정을 중심으로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는 광주학생사건을 주도한 윤가현을 비롯 1934년 전남농민회 사건의 윤가현, 윤소현, 윤이현, 윤경득, 윤재웅 등이 일제치하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고, 1950년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으며 6.25때는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강진 대구면 수동리에 구전되는 '야학소 노래'를 소개한다.


꼬불꼬불 논둑길 걸어가며는

고개 밑에 조그마한 토막집 하나

낮이면 나무하고 아기도 보고

저녁이면 공부하는 우리 야학소

저녁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부지런히 공부하고 씩씩하여라

글 모르면 어리석고 어두웁단다.


작성자 : 윤영(수동마을 문화재 관리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