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시골, 동창생들 까페


어젯밤 항촌에 사시는 집안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추석에 왜 안내려왔냐고 묻고, 몇마디 더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이내 본론을 얘기하셨다. "음력으로 9월 10일(양력으로 10월 8일)이 '천동 시제'니까 가급적 시간을 내 보라"는 거였다. 일단 알았다고 하고, 놀러 한번 오시라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어떨결에 받은 전화인데다가 TV를 보던 참이라서 다소 멍멍한 상태였는데,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도 그분의 목소리가 긴 잔상으로 남았다. 그러다 급기야 리모컨을 눌러 보던 TV도 꺼버릴 정도로. 

이 나이에 벌써 시제엘 간다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오래 전에 했던 형 말이 생각났다. 시골에서 면직원으로 청춘을 마친 큰형은 여기저기서 인심도 못얻고 집안일은 물론 형제간 일에도 어긋남 투성이였었는데, 그 형이 언젠가 내게 한 말이 귀에 박혔다. "나도 나이 오십에 손자 보게 생겼는데, 그깟 항렬 좀 낮다고 시제에 가면 맨날 애들처럼 심부름을 해야 해서 안간다"는 거였다. 그럴 법도 했다. 집안에서 현자 항렬(영자 항렬도 있지만)은 항렬이 낮아서 가면 맨날 심부름을 하기 일쑤니...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그게 꼭 그런 자리에서 그렇게 자존심 내세울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 생각도 났다.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아버지는 줄창 시제엘 다녔다. 시제는 얼추 열개도 넘었다. 지석리, 표장리, 월하정, 항촌... 그리고 내가 모르는 곳도 많았다. 그 무렵이면 농삿일도 끝나려니와 날씨도 좋고, 사정이 여느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든든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아버지가 시제엘 가시면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오실 때에는 꼭 '꺼렁지'를 들고 오셨다. 친구들, 기억날 지 모르지만, 꺼렁지는 짚으로 길게 싸서 그 안에 떡이며, 전, 과일, 고기 같은 것을 그야말로 넘쳐나게(옆구리가 미어터지도록) 가져오던 그런 것이었고, 그 가래떡을 형과 함께 쇠죽을 쑤던 아궁이에 구워먹던 기억은 지금도 아련하다.

어머니는 홍어를 좋아하셨는데, 정말이지 몇해에 한번 걸러 아버지는 누리끼리한 요소비료 종이에 둘둘 말아싼 홍어를 가져오시기도 했다. 그럴 때 어머니의 표정... 난 그때는 홍어의 맛을 몰랐다. 후에 광주에 와서 홍어를 먹고, 홍어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꺼렁지를 먹는 무렵이면... 수양리에서 장촌리까지 걸어다녔던 우리들은 늘 조금이라도 더 걷는 거리를 단축시켜 보려고 빈 논을 무질러서 가기 일쑤였는데, 그 논에 베어낸 벼포기에 거미줄이 쳐지고 거기에 이슬방울이 구슬처럼 달려서 온 들판을 하얗게 뒤엎고 있던 그 장관을 나는 내 인생의 한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벗들도 기억하는지. 그런 무렵이면 유난히도 소슬했고...

종종, 그 꺼렁지에는 요즘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무지 귀하고 예뻐보였던 유자가 들어있기도 했다. 그때는 유자가 귀해서 시젯상에도 많이 올리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항상 꺼렁지에 그것이 들어있는 게 아니라, 그날 시제에 간 손님들 중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그것을 받을 만한 때에만 그것이 들어있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볼 때와는 달리 그것은 또 그리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먹을 수도 없어서 호주머니에 넣어갖고 다니며 친구들한테 자랑이나 치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무렵이 되어 그만 방구석에 내버려두게 되면  거무튀튀하게 말라비틀어져 구석퉁이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쉽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시제... 10월 8일이면, 평일이라 가려면 내가 휴가를 내야하는데(하루 휴가보상비가 얼마더라? 것도 내겐 큰 돈인데...), 그건 할 수 있다 치더라도, 때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내가 잘 아는 화가의 개인전 오픈하는 날이다. 담양에서 태어나 함부르크에 사는 여성작가인데, 간호사로 서독에 갔다가 그림을 배워 화가가 된 분이다. 누나 같은... 그분 그림에는 온통 '촌년 티'가 좔좔 흐른다. 그 촌티가 유럽에서 먹혔다. 내가 언젠가 그분 그림에 대한 짧은 글을 하나 썼더니, 그분은 너무나 좋아라고 나에게 편지도 보내오고 그림도 보내오셨던 분인데, 때마침 그날 서울에서 전시를 오픈한다. 오래 전부터 내게 연락을 해오고, 나도 역시 꼭 가겠노라고 말을 해둔 상태인데 말이다.

그나저마, 그런저런 약속이니 뭐니 하는 것보담 밤새 날 뒤척거리게 한 것은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곳엘 기웃거려도 되나?'하는 것이었다. 가면 당연 내가 제일 '끝발'일거구, 게다가 거기에 온 사람들 누구 한사람 나를 모를 것이고(물론 아버지 이름을 대면 누구 아들인지는 알겠지만), 또 요즘 같은 세태에 어째 뉴욕이나 파리 아니면 하다 못해 사람은 나서 서울로 가랬다고 하다 못해 서울도 아니고 시골 시제 같은 고리타분한 데엘 간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잔 많이 껄적지근 하다. 

내가 이런 난망한 지경에 빠진 건, 이 까페 때문이기도 하다. 까페를 종종 들락거리다 보니, 차츰 고향 생각이 많이 났고, 그러다 어쩌다 보니 시골에 많은 생각이 가게 되었고, 봄에 언젠가는 영선이를 통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손자인 우리 '방산' 할아버지의 존재와 글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항촌에 사시는 그 형님까지 만나게 되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오로지 시골에 사시면서 노모를 모시고(형수님은 목포에 계심) 살며, '다산학'을 공부하시는 한편으로 문중 대소사에 나다니시면서 지내시는 그 형님에게, '시골', '집안내력' 이런 데 관심이 많다고 얘기를 해버려서, 그분이 요즘 같이 '후배(?)' 보기 어려운 마당에 나같은 쑥맥이 걸려들었으니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거나 진배 없다'고 생각하고, 날 시제에 불러내린 것이다.

게다가 어젯밤 통화에서 그 형님은 "그래 학교엔 잘 나가고?"라고 하셨다. 내가 한문공부를 하러다니는 걸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셨다. 말은 그렇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기실 여름휴가 뒤로는 근 한달간 수업을 빼먹었다. 회사 일이 '공장 대목이어서 말이다' 

글쎄, 다음달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내내 이 생각에 오락가락 할 것 같다. 추석 지나니 시향 지낼 날이 금새 다가온다. 정말 세월은 화살같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