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Ld6fAO4idaI 이 노래를 틀어놓고 들으셔도 좋습니다.


1700년 초반기에 태어나 사셨던 항촌파 '광 자 택 자' 할아버지 이야깁니다. 대강으로 주워들은 얘기들이니 이해해주셔요.


공은 '해룡공'이라 자호했습니다. 강진 도암에 사시면서 '바다의 용'을 지향하셨으니 얼마나 기상이 크셨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항촌파 종손이셨구요. 공은 무척 부지런하고 영민하셨던 것 같아요. 해서 4개의 가훈을 만들어 썼는데, '아침에 새가 울기 전에 일찍 일어나라'는 등속의 작지만 중요한 내용의 주로 근면/성실에 관련된 내용들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상당한 재력이 있었지만, 연동과 마찬가지로, 아님 연동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대 바다를 대상으로 많은 간척사업을 해서 땅을 늘려나갔습니다.


강진 도암에서부터 지금의 목포에 이르는 해남 산이까지의 각곳에서 간척을 해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지금도 북평과 산이에는 약간의 땅이 남아있습니다. 하여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연동에도 더러 도움을 주곤 했을 정도라니 상당한 정도였던 것 같아요. 참고로 간척사업은 연동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정도의 재력과 인력 동원력이 있는 사람만이 손을 델 수가 있었습니다. 자세힌 모르지만, 당시 농토가 적으니 바다는 누구든 간척만 하면 세만 내면 전적으로 간척자에게 소유권을 줘서, 당시로선 가장 큰 사업영역이었던 것 같아요.


그분은 그렇게 쌓은 부를 개인적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인근 고을사람들과 고루 나눴습니다. 하여 해룡공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고, 지역에서의 서로의 물산을 활발하게 유통시키기 위해 도암에 장을 열어서 이를 활성화시킬 정도였습니다. 잠깐 이 부분에서 제가 강진/해남 인근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해남윤씨들이 살았던 곳에서는 '덕 덕 자'를 많이 썼더라구요. 연동의 덕음산, 강진 도암의 덕룡산(해룡공이라는 호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만덕산, 만덕리, 강진읍의 덕남리 등등 분명 우리 해남윤씨들은 '덕'자를 숭상했음이 틀림 없어요. '3개옥문지가'였으니까요.


조선 후기 당파에서 우리 해남윤문은 남인계열이었고, 경상도 퇴계선생에게서 공부한 호남의 집안이 남평문씨와 해남윤씨 뿐이니 남인 중에서도 상당한 강경파였던 것 같아요. (여담입니다만, 그래서 장성 김씨집안'(진원면 서원이나 다른 면에 있었던 서원과는 다른) 많은 차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분은 또 자제들과 친척들을 모아 지금의 중등교육과정에 필적하는 학당을 열었는데, 그곳이 도암에 있는 농산별업입니다. 여러모로 추론해본 결과 이곳은 일테면 '주경야독'을 하는 곳이었고, '실사구시'적 태도를 가졌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가르쳐서 더 공부를 해야 할 이들(그러니까 지금의 고등과정 정도는)은 연동으로 보내 공부하게 했습니다. 항촌쪽 문헌에는 항촌파에서는 일찌기부터 과거를 보려는 이, 가능성이 있는 이에게는 평생이라도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요즘말로 '장학답'이 있었다고도 해요.


그분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아버님 정재원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화순현감을 지낸 적이 있는 정재원의 처가가 연동이었구요. 해서 능주에서 걸어서 연동에 가는 길에 도암에 들러 교분을 나누곤 했다고 해요. 아마 그때 잠시 다산이 어렸을 때 화순에 와 지낸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외갓집에 가던길에 도암에 들러 역시 '광택'할아버지의 아들 윤서유와 얼굴 정도를 본 것 같고... (기록에는 없는데) 시간을 훌쩍 건너 사화 때(1799년?) 다산가가 서울에서 고역을 치르실 때, 역시 윤서유도 병영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해서 다산이 유배오셨을 때, 한동안은 무서워서 연락도 못하다가 한참이 지난 뒤 사촌동생을 보내 안부를 묻고, 그런 방식으로 내왕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몸이 자유로와지셨고, 귤동으로 오셨을 때에는 매해 봄에 연례행사로 항촌에 오셨다고 해요. 다산의 그런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후에 다산과 옹산은 서로 사돈을 맺게 되는데, 그런 연분은 이미 서로의 아버지 때인 정재원과 해룡공 할아버지 때부터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뭐라시겠지만, 우리 선대들이 배포가 컸고, 시쳇발로 '뻥'이 셌던 것 같아요. 말들을 보면 모두 강경파 일색들 같았으니까요. 우리 항촌파에 근래 '극렬운동가(? 5.18 최후수배자, 작고, 영자 학렬)나 문계 때 나누는 대화들을 들어보면 그랬어요. 그래서 그런 시쳇말로 '뱃짱'이 간척사업을 가능하게 했고, 부를 쌓게 했고, 또 그것을 흔쾌히 주변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항촌파 기록들을 보면, '진산'으로 집안 자제들을 보내 혹독하게 교육시켰다고 하는데, 요즘 부잣집 아이들이 돈 있다고 흥청망청 하는 것과는 달리 춥고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하게 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공이 사셨을 때 항촌파가 최대의 부를 쌓았던 때였더 같습니다. 강진 도암 일대가 거의 모두 '텃밭'수준이었으니까요. 더불어서 문화적으로도 최대로 풍요로웠고요.


그런데, 손자(방산 윤정기)가 요즘 말로 연좌제에 걸려 노론들에 의해 번번히 벼슬길이 막혀서, 그냥 손도 없이 말년을 핍진하게 지내시다 돌아가시고 말았고, 또 그 무렵 종손가가 서울로 이사를 가버렸고, 그러는 통에 서서히 살림이 줄어들었던 것 같아요. 하여 지금은 그때의 그 많던 땅들이 다 흩어지고, 그저 소소할 뿐인 실정입니다.


공의 묘소는 지금 도암 농소에 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시제에 참여하는 문원들 수도 줄어들고(올해는 열다섯분 남짓 정도밖에) 집안개념도 희미해지고, 옛 일도 기억하고 되살리려는 이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무엇보다 '덕'자를 숭상했던 우리 집안이 그런 미풍을 많이 잃고 다른 지역분들과 그저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제가 요즘 보길도엘 자주 가는데, 같은 소종중은 아니지만, 동행자들과 고산할아버지 얘길 많이 나누곤 합니다. 제가 글을 쓰고 미술에도 관여한 바가 있어서 작가들과 같이 가서 그림도 그리고, 때로 어줍잖은 글도 쓰곤 합니다만, 모르고 부족한 것들 투성이입니다. 저는 아직 젊고, 철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구요.


오랫만에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그만 두서없는 얘길 적었네요. 두루 해량하시고 질정해주세요. 혹시 더 보시려면 다음을 참조하셔요. http://waterpark.egloos.com/category/%E8%88%AB%E5%B1%B1%E8%B9%A4%E5%8E%9F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