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 내용은 제가 우연히 찾게된 내용입니다.

글 제목인 즉, '해남윤씨와 칠원윤씨의 조상이 같을까 ?' 입니다.

제가 한자공부를 하고있지만 어느정도 내용파악은 됩니다만,

다소 애매한 부분들이 있기도하고,

여러모로 궁금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리를 쓰고 글을 옮겨왔습니다.

글을 퍼온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도는 없고 혹여 이 내용에 대해서 신빙성이 있는가도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시는분이나 어느정도 알고계시는 종친 어르신들께 여쭙고자

글을 옮겨왔으니, 저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셨음 좋겠습니다.

 

참고사항 :

칠원윤씨는..

시조; 윤시영 태자태사
중시조;윤거부 묘소; 경남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
옛 칠원군이었다 창원에 속하다1895년 함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저의 작은 소견으로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시대때도 돌림자가 혹여 있었다면,(저의 추측입니다.) 

저희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11세기인 고려 중엽 문종(재위 1046~1083년)때에 생존하셨던 분입니다

칠원윤씨 중시조는 윤거부(尹鉅富)로서 그의 생전 기록이 전혀 없으신분이지만 단순, 고려 호장을 지내셨다는 기록만 전해집니다.

혹여 두분의 존명에 부(富)자가 같음은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다소 의구심이 들긴합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도 남아있는자료가 없으니 다만 의구심만 증폭되어 혹여 이에대해 아시는게 있나하여 그냥한번 제 생각을 올려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래의 글은 한번 쭉 읽어보시고

알기 쉽게 자세히 답글을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옮겨온 글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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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승 휘 환의 사적기록 고찰(尹政丞 諱 桓의 史的記錄 考察)

 一, 사적(史蹟)의 기록(記錄)

    윤환(尹桓 ?∼1386年(고려 우왕12연)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호군(護軍), 충혜왕(忠惠王)때 대언(代言)이 되었다.

충숙왕 복위(復位)때 옥사(獄事)가 일어나 이에 연좌된 뒤 해도(海島)에 갇혔다가 원(元)나라로 망명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가서 조적(曺적)의 란(亂)때 시종의 공로로 공신의 호를 받고 벼슬이 충정왕초(忠定王初)에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피봉 되었다

  공민왕 3년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나 한때 귀양갔다가 뒤에 칠원백(漆原伯)의 봉작을 받고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환(桓)은 원래 무관(武官)이었으나 왕명으로 춘추관사(春秋館史)를 맡아보다가 곧 사퇴하였으며 우왕(禑王)때 다시 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있다가 졸(卒)하였다. 그는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때 까지 육조(六朝)를 섬기면서 세 번 수상(首相)을 역임하는 등 공신(功臣)이 되었다.

 집이 거부(巨富)였는데 치사(致仕)하고 고향 칠원(漆原=현 경남 함안에 있었던 지명)에 내려가 있을 때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그는 가재(家財)를 내어 빈민을 구제하고 그들의 계권(契券)을 모두 태워버렸다. 이때 날씨가 오래 동안 가물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환(桓)의 토지부터 적시고 다른 사람의 토지도 적셨는데 그해 대풍이 들었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칭송하기를 마지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二,  漆原尹氏의 族譜 (칠원윤씨의 족보)

 고려말 그들의 중세조(中世祖=18世)가 우리 시조공의 6세손(始祖公 6世孫) 좌의정공(左議政公) 휘(諱) 환(桓)과 휘자(諱字)와 관직(官職)이 똑 같은 분이 있는바. 고려사(高麗史)나 칠원읍지(漆原邑誌)에도 이분들의 휘자와 관직이 또 같이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와 칠원윤씨 선조가 혹시 동일인으로 양윤(兩尹)의 같은 조상이 아닌가?  하는 의안(疑案)이 선세(先世)로부터 우리 족보기록에 실려 전해오고 있다.

  그러면 고려사와 칠원읍지 또는 칠원윤씨 보록(譜錄)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고 이를 다시 두분 사적에 있어 같은 점과 다른 점등을 알기 쉽게 표를 만들어서 첨부하고 끝으로 선인(先人)들의 말씀을 첨기(添記)하여 훗날에 참고로 주고자 한다.

1. 고려사에는 우왕조에 정승 윤환(尹桓이) 사직하고 고향 칠원으로 돌아갔다 하였고

2. 고려사망기(高麗史網記)에는 우왕 6년(1379)에 윤환이 정승이 되었으며 동11년(1385)에 졸(卒)하였다 하였으며,

3. 여지승람(輿地勝覽)(전국의 지리 풍속 인물 등을 각 州邑별로 기록한 책으로 朝鮮 成 宗 9년에 편찬하였음)에는 고려때 윤환은 오조(五朝=고려 충혜왕부터 우왕까지)를 역사(歷事)하면서 세번 수상(首相)이 되고 칠원군에 봉작     (封爵)된 분이며 그 아들은 잠(岑)이니 관직은 사마(司馬=進士)라 하였고

4. 칠원읍지(漆原邑誌)에는 윤정승(尹政丞)의 휘(諱)는 환(桓)이니 그의  아들의 초휘(初諱)는 록화(祿和)요. 개휘(改諱)는 잠(岑)이며 진사(進士)라 하였으며,

5. 칠원윤씨 보록(譜錄)에는 고려조정승(高麗朝政丞) 환은 5형제이지만   환이 아들이 없어 둘째동생 장(樟)의 아들 휘 천효(天斅)로 하여금  입계(入系)하게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를 다시 두 분의 사적이 사기와 보록과 같은 점 다른 점을 알기  쉽게 하기위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은 아래와 같다.

    구분

   기 록

칠원윤씨 선조

    구분

    기록

 우리 선조 휘 환 부군

諱字

官名

子의名과 官名

居所와  在世年代  

諱字

官名

子의名과 官名

居所와  在世年代

高麗史

 

高麗史

×

歷史網目

 

歷史網目

×

輿地勝覽

×

輿地勝覽

×

漆原邑誌

×

漆原邑誌

×

漆尹譜錄

×

??

漆尹譜錄

×

×

   ※ 보기  ○ = 같음,     × = 다름,      ?? = 분명치 않음,  

   이상 각항 기록과 우리 보록(譜錄)을 대조하여 보면 1항부터 4항까지의 사실은 그 휘(諱)와 관(官)은 물론 그 아들의 諱와 官까지 우리 선조 환(桓)과 똑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5항의 칠원보록에는 두 분의 諱와 官만 같을 뿐이고 그 선조의 이름과 그 아들 이름과 벼슬이 우리 선조 록화(祿和)와 전혀 다르며 더욱 모순 점은 그들의 보록에 아들이 살았던 곳이 칠원읍지의 기록과 전연 다르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우리 선인들은 다음과 같이 고증(考證)을 들어 전해 주었다.

1. 고려사망기(高麗史網記)에는 우왕11년(1385년)에 칠상(漆相)이 졸(卒)하였다 하였는 즉 이때는 바로 광전(光琠) 선조께서 소윤공(少尹 公)에게 노비급부(奴婢給付)하시던 해인 至正14년(1454)보다 31년후이니 두 분의 재세연대(在世年代)가 서로 다르며

2. 설사 우리 선조와 칠상(漆相)이 같은 사람이라 보고 장수(長壽)하여   손자가 증손자에게 노비급부 함을 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보존해온 급부문서(給婢文書) (註 光琠께서 少尹公께 급비하신 문서  병진보 1권 參照)를 보면은 위업(偉業)과 공(功)이 빛난 생존정승(生存政丞)의 차손(次孫)이 거향 탐진 감무(居鄕 耽津監務)에게 제출한 문서로는 그 체모와 격식이 좀 저자세 적이라는 감이 있으며

 3. 여지승람에 실린 윤정승은 칠원읍 인물이 확실하며( 註 여지승람은 칠상 이 졸한 후 93년에 당시 박학 노사신(盧思愼)이 편찬했으니 그가 前朝 名相의 卒年을 모를리 없는고로)

   우리 선조 윤정승은 급비문서로 보아 탐진현에 계심이 확실하니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4.  칠원읍지에는 윤정승의 아들 이름이 녹화(祿和)요. 개휘(改諱) 잠(岑)으로 되어있어 우리 선조와 똑같으나 칠원윤씨 보록에는 조카 천효(天斅)로 입계(入系)하였은 즉 그들의 보록 또 신빙성이 없다.

    이러하므로 "海南尹과 漆原尹이 본시 동조(同祖)였던바 후에 분파 (分派)되었다"는 말은 "이유와 근거 없이 추측만으로 할말이 못된다" 고 써있고

  또 해남윤씨 17대손 정기(廷琦)(참봉공 휘 효례의 후손 호는 방산(舫山))은    "칠원의 윤정승과 우리 선조 윤정승과는 우연적 동명인(同名人)이지    결코 동일인(同一人)이 아니라" 하였다. (丙辰譜 第一卷 17 쪽 參照)<윤도흠종친 제공>